올해로 44회를 맞는 프랑스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의 장편경쟁 부문에 안재훈 감독의 <무녀도>와 조경훈 감독의 <기기괴괴-성형수>가 진출했다. 김동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무녀도와 네이버의 인기 웹툰 ‘기기괴괴’ 의 한 에피소드를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기기괴괴-성형수. 이들 작품 중 무녀도가 독특 하고 도전적인 작품을 선정하는 섹션인 콩트르샹 (Contrechamp)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K-애니메이션의 힘을 보여준 이 두 작품의 제작을 진두지휘한 안재훈 감독과 조경훈 감독을 만나 영화제 진출에 대한 소감을 들어봤다.
기기괴괴-성형수 _ 조경훈 감독
장편경쟁 부문 진출 소감은?
꾸역꾸역 만들어서 보여줄 수있는 수준이 됐다는 판단에 출품했는데 기대는 안 했다. 영화제에 나가본 경험도 별로 없어서 작품이 과연 영화제와 어울릴까라는 생각도 들었다.(웃음) 영화제에 초청됐다는 소식은 뜻밖이었다. 스튜디오애니멀이란 회사가 여러 협력사와 크리에이터들과 함께 쌓아온 노하우와 애니메이션에 대한 진정성 등을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보람차고 기쁘다. 그간 고생하고 노력한 것에 대한 일정부분의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원작으로 기기괴괴-성형수 에피소드를 선택한 이유는?
에스에스애니멘트의 정병진 PD가 기기괴괴란 원작에 관심을 가지면서부터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정 PD가 원작을 공포 괴담 시리즈로 만들어보면 좋겠다며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귀신 잡기 에피소드를 파일럿 형태로 진행했다. 이때 중국에 유출된 성형수 에피소드가 현지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2015∼16년 당시 중국 시장에 대해 관심이 많았을 때인데 현지에서 신드롬이 일 정도였으니 성형수 에피소드로 뭔가 해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이후 원작 자체의 내용이 좋고 이슈가 된 만큼 TV 용 스페셜 시리즈가 아닌 극장판으로 만들게 됐다.
원작과 달리 애니메이션 영화만의 특징이 있다면?
웹툰을 극영화로 그대로 옮기면 캐릭터의 감정이나 정서의 묘사가 생략되거나 건조하기 마련이다. 때문에 캐릭터 감정의 충실한 묘사에 초점을 맞췄다. 따라서 이 영화는 오로지 주인공 예지가 뚱뚱해서 무시당하고 괴로워하다 성형수란 존재를 만나 외모를 변화시켜 탈출구를 찾아 달려가는 절박함, 모종의 사건으로 모든 것이 허사가 돼 이를 되돌리기 위한 몸부림 등 롤러코스터 같은 일련의 과정이 주인공 중심으로 흘러간다. 원작의 기본적인 플롯은 유지하되 영화적인 장치들을 많이 가미해 최종적인 느낌은 원작과 완전히 다를 것이다. 두 번째는 폭력을 다루고 싶었다. 남성주의 사회에서 여성이 당하는 폭력이 아닌, 인간과 인간이 가하는 폭력, 폭력을 조장하는 사회 시스템이란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마지막으로는 기존 공포영화의 기법에서 벗어나 관객이 보다 직관적으로 느끼도록 최대한 친절하게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중요한 것은 관객이 느끼는 공포가 아니라 주인공이 느끼는 공포를 중심으로 묘사했다. 주인공의 불안감과 공포를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이다.
심사위원들이 작품의 어떤 부분을 주목했다고 보는가?
심사위원들 중에 작품의 원작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작품의 소재와 이야기의 흐름이란 측면에서 볼 때 원작이 지닌 충격적인 콘셉트와 내용이 색다르지 않았나 싶다. 원작의 힘이 컸다고 본다. 또 괴담 해프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에 대한 얘기를 담으려는 노력들을 조금 더 좋게 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국내에서는 언제쯤 개봉할 예정인가?
현재 중국 상하이국제영화제에 초청받았고 유럽의 여러 영화제에서도 연락이 오고 있다. 배급사도 결정돼 있는데 영화제를 통해 관객들의 피드백이나 해외 바이어들의 반응, 코로나19 상황, 경쟁작들의 움직임 등을 종합적으로 보고 국내 개봉 규모나 방식을 조율할 것이다.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가 온라인으로 진행되는데 여기에서는 풀 버전보다 편집본이 상영될 것으로 보인다. 편집본 분량은 10분에 불과하지만 오프라인 영화제에 비해 훨씬 더 많은 관객과 영화 관계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기회라서 더욱 기대된다.
앞으로의 작품 구상 또는 계획이 궁금하다
사실 이번 작품을 감독했지만 파트별 담당자들에게 그저 막연하게 큰 줄기와 방향성에 대해서만 얘기했을 뿐이다. 실질적으로는 시나리오 작가, 스토리보드 감독, 레이아웃 감독, 3D 애니메이팅 감독, 아트디렉션 감독, 합성효과 감독 등 파트별 담당자들이 내 의도를 명확히 수행하고 부족한 부분들을 메워줬기 때문에 완성도 높은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다. 따라서 작품의 디테일이나 기술적인 부분을 담당하기보다는 총괄 프로듀서로서의 생각과 에너지, 철학들을 각 파트별 감독과 프로듀서가 공유하는 시스템을 구축해 감독의 의도가 관객에게 명확히 전달될 수 있는 작품을 만드는 데 노력 하겠다. 이를 통해 감독이 의도하는 지점으로 관객들을 이끌어갈 수 있는 작품들을 선보이겠다. 항상 돈은 부족하고 상황은 열악하지만 관객에게 재미와 공포, 슬픔, 기쁨, 즐거움을 주는 일은 언제나 설렌다. 앞으로 기회가 주어진다면 2차 부가사업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작품보다 오로지 작품으로만 승부하는 상업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
무녀도 _ 안재훈 감독
수상을 축하드린다. 소감은?
유례없는 상황에서 유례없는 방식으로 진행된 영화제에서 수상 소식을 들으니 기분이 색다르다.(웃음) 한국적인 독특한 뮤지컬 시퀀스로 풀어낸 부분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관객들이 모인 영화제에서 상영돼 그들의 반응을 직접 볼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전혀 다른 생활양식과 문화를 가진 각국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애니메이션이란 같은 형태의 작품을 보는 것이 영화제가 가진 가장 큰기능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영화제란 무대에서 무녀도를 선보일 수 있게 돼 기쁘다. 무엇보다 제작진에게 특별한 선물이 되는 것 같다. 제작자들이 각자 생각해 공들여 만든 작품을 다른 사람들이 보고 느낄 수 있는 기회는 인생에서 몇 번 주어지지 않는 소중한 순간일 것이다. 영화제가 코로나19 때문에 온라인으로 진행돼 관객이 모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앵콜 상영이 이뤄지길 기대하고 있다. (웃음)
원작으로 무녀도를 선택한 이유는?
어떤 작품이든 그 시대의 화두를 던질 수 있는가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무녀도는 한국의 근대 단편소설이지만 주제가 지금 시대에도 맞는 화두라고 생각해 선택했다. 전 세계에는 인종, 차별, 양극화 등 여러 형태의 갈등이 팽배해 있지만 그중 종교로 인한 갈등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 수많은 분쟁의 불씨로 남아 있다. 무녀도에서 무당 모화와 독실한 기독교인 아들 욱이의 대립과 반목, 무속신앙과 기독교의 충돌은 한국 근대사에서 종교 이상의 사상적 갈등을 함축하고 있다. 이 같은 세계관과 메시지가 현재에도 시사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시대를 앞선 1936년에 이 같은 화두를 용기 있게 던진 원작자에 대한 존경의 의미와 더불어 오래전 부터 내려온 무녀라는 직업을 가진 온전하고 자립적인 여성의 의미를 되새기고, 수많은 직업이 생기고 사라지는 요즘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속신앙과 직업을 지키고자 했던 모화의 모습이 깊이 있는 울림을 주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원작에 숨은 행간의 의미를 영상화하는 과정이 어렵지 않았나?
직접 쓴 시나리오가 아니라서 원작 뒤에 숨을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자 단점이다.(웃음) 무녀도는 다른 단편 소설보다 서사구조가 탄탄해 이야기를 강하게 끌어갈 수있는 장점이 있다. 단편 문학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설 속 모습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닌 해석이다. 작가가 행간에서 표현하려 했던 것을 영상화하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인물간 심리묘사와 소설 속 상황 등을 여러 각도로 고민해 장면을 구성하는 작업을 거치면서 굉장한 묘미를 맛봤다. 당시의 물건이나 소품, 건축물 등을 찾아 묘사하는 부분들도 꽤 힘들었지만 의미가 남다르다고 생각한다. 무녀도는 조만간 개봉할 예정이다. 그러나 그전까지 최선을 다해 다듬을 것이다. 작품의 재미와 만족도는 관객의 몫이지만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수준의 작품을 선보이는 것은 제작진의 몫이다.
뮤지컬 형식을 가미한 배경이 있나?
무녀도란 작품을 선정했을 때 흔히 떠올리는 굿판을 벌이는 모습에 애니메이션 만의 해석을 덧붙여 다르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래서 원작이 가진 글의 느낌과 서사들이 뮤지컬이란 장치와 얼마나 어울릴 것인가 고민했다. 사실 애니메이션 제작하는 사람들은 다들 알지만 노래가 가미된 애니메이션은 자본이 많이 투입되는 탓에 꺼리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돈 때문에 언제까지 뒤로 미룰 순 없다고 생각했다. 전세계 관객들에게 한국 고유의 음악과 문화를 보여주는 기회라고 봤다. 각국의 전통문화를 독창적으로 표현해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다는 영감을 주려는 의미도 있다.
심사위원들이 작품의 어떤 부분을 주목했다고 보는가?
수많은 애니메이션 작품들을 봐오던 심사위원은 조금 다른 시야와 시각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전제한다면 할리우드의 고유 영역처럼 된 뮤지컬 시퀀스(sequence)를 우리나라의 전통악기로 해석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또 일본, 중국과 다른 한국만의 애니메이션 빛깔과 스타일에 주목한 것 같다. 또한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알게 된 한국 사회가 가진 투명성, 국민들의 지적인 성숙, 사회갈등의 치유 과정 등에 관심이 모아진 부분도 있지 않나 싶다.
앞으로의 작품 구상 또는 계획이 궁금하다
곧 완성될 ‘살아 오름: 천년의 동행’ 이란 극장용 애니메이션에 몰두하고 있다. 앞으로는 한국적인 작품을 꾸준히 보여주고 싶다. 한국적이라고 해서 경복궁이나 한복 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조선의 백성이 아닌, 대한민국의 시민으로 살면서 보고 겪고 느꼈던 지금의 시대를 표현하고자 한다. 예전에는 누가 투자한다면 두려움이 앞섰지만 지금은 나를 믿어주는 제작진이 있고 관객을 확장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돼 작품에 대한 욕심이 생긴다. 20대 때 제작 지원을 받아 처음으로 창작 애니메이션을 시작한 이후 여러 기관과 사회적 지지, 제작진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다. 앞으로는 이들과 관객들을 더욱 확장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을 치열하게 만들고 싶다. 그러나 작품을 시작하면 책 한 권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웃음)
출처 : 월간 <아이러브캐릭터> 2020.7월호
<아이러브캐릭터 편집부> (master@ilovecharac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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