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참 용감했던 것 같다. 미국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미국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에 시작한 유학이었다.
내가 유학을 준비하고 있을 당시는 홍익대 시각디자인과 동기들이 졸업전시회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내 동기들은 취업과 석사 진학에 열심히 노력 중일 때, 난 다음 대학 교의 새내기가 한 번 더 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몇몇의 친구들은 내가 유학을 준비 중인 것은 알았지만 학사과정을 또 밟을 거라는 것은 몰랐을 것이다. 그때는 왠지 기초 부터 배우고 싶었다. 그냥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팬이 아니라 애니메이션의 기초부터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싶었다.
졸업 후 이듬해 가을, 난 미국 플로리다주에 있는 링링미술 대학(Ringling College of Art and Design) 컴퓨터 애니메이션과에 입학했다. 링링은 3D 애니메이션 제작과정의 대부분을 가르쳐주는 커리큘럼을 운영하고 있어 덕분에 졸업할 때쯤엔 3D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는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이든 미국이든 취업 준비는 만만치 않았다. 학교 커리큘럼을 잘 수행하는 것은 물론 취직을 위해, 또 아티스트로서 나만의 색깔을 찾고 어필하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 그중 다음과 같은 것들이 가장 중요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뭘 하고 싶고 뭘 잘하는지 생각하기
애니메이션의 기초부터 모든 것을 배우고 싶었던 난 처음 에는 모든 제작과정을 골고루 다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미국 애니메이션 회사의 취업 스타일은 제너럴리 스트(Generalist)보다 스페셜리스트(Specialist)를 더 선호했다. 제너럴리스트는 모든 부서의 일을 일반적으로 골고루 잘하는 사람이고, 스페셜리스트는 특정한 부서의 일을 전문적으로 잘하는 사람이다.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파트는 생각보다 많다. 크게 나눠도 스토리, 캐릭터디자인, 편집, 모델링 등 13개나 된다. 큰규모의 애니메이션 회사에 들어가고 싶다면 어느 분야에 가장 흥미를 느끼고 객관적으로 가장 잘하는 스페셜 파트가 무엇인지 일찍 찾고 깨달아야 한다. 4년이라는 제한된 기간 동안 여러 분야를 다 잘하려고 하는 것보다 가장 특별한 한 파트를 중점적으로 파고들면 스페셜리스트로서 지원 하기 유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급하게 서둘러 찾으려고 하면 안 된다. 난 애니메이터(Animator)가 취업이 잘될 것 같아 2학년 때 매달려 있다가, 결국 잘 맞지 않아서 1년 동안 헤맸던 기억이 있다. 내가 스토리 파트에 확신이 든 시기는 3학년 초 때였다. 스토리 수업은 들을수록 즐거웠고 제출한 과제를 본 교수님이나 동기들의 호응도꽤 좋았다.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재미있었고 컴퓨터그래픽과 달리 직접 손으로 캐릭터를 그릴수 있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주변에 조언 구하기
규모가 큰 미국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는 지원자들이 넘쳐 난다. 때문에 스튜디오 측에서는 눈에 띄는 작품이 아니면 그냥 넘겨버릴 확률이 매우 높다. 한눈에 사로잡을 수 있는 스토리보드 포트폴리오를 준비하기 위해서 제일 도움이 컸던 것은 주변에 조언을 구하는 것이었다.
3학년 당시 취업을 준비하면서 내가 가고 싶은 스튜디오에서 일하고 있는 선배들 중 내가 배우고 싶은 스타일을 가진 선배에게 포트폴리오를 종종 보내 조언을 구했다. 선배는 어떤 순서로, 어떤 디자인으로 포트폴리오를 구성해야 하는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조언들을 해줬다. 그리고 내 주변에 비슷한 목표를 가진 친구들에게도 조언을 구하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됐다. 다들 비슷한 어려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서로 좋은 정보를 나누고 응원하면서 더욱 힘을 낼 수있었다.
픽사 스튜디오 인턴십에 지원할 때도 친구들 덕분에 지원할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당시 학교 과제로 너무 바빠 지원 마감시간을 지키기 어려웠다. 난 ‘완벽한 결과물을 내도 합격하기 어려운데…’ 란 생각에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옆에서 내 넋두리를 들어주던 동기가 “완성 여부를 떠나 지원해보라. 잃을 게 뭐가 있냐. 지원을 안 하면 합격 확률이 0%지만 내면 0.001%라도 있는 것 아니냐” 며 용기를 불어넣었다. 그 말에 힘입어 부족하지만 결과물을 제출했고 마침내 픽사 스튜디오에서 이메일을 받게 됐다.
꿈과 기대를 품고 간 픽사 인턴십
꿈에 그리던 픽사 애니메이션 캠퍼스에 발을 디뎠을 땐 정말 날아갈 것 같았다. 그토록 원했던 3D 애니메이션 회사였다. 3개월간의 인턴십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것을 배웠다. 총 6명으로 구성된 스토리 인턴십 프로그램은 생각보다 엄격했다. 픽사 스튜디오의 스토리 부서는 자부심이 매우 높기로 유명하다. 아이디어 내는 방법부터 정해진 시간 안에 작품을 완성해 발표하는 것까지, 조금만 부족한 부분이 있어도 멘토에게 날카로운 지적을 받기 일쑤였다. 특히 발표할 때는 정말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 제대로 말할 수조차 없었다. 왜냐하면 방송에서만 봤던 감독들과 뛰어난 스토리보드 아티스트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표할 때마다 머릿속이 하얘진 나머지 영어도 잘되지 않아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학생 신분에서 벗어나 실무자처럼 스토리 부서에서 일하면서 스토리보드 아티스트에 그림도 중요하지만 커뮤니케이션 능력도 아주 중요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내가 그린 이야 기를 어떻게 전하느냐는 것도 관객의 평가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처음에는 영어로 발표하는 것이 어색했다. 그렇지만 이를 벗어나는 방법은 끊임없는 연습밖에 없었다. 난 하루 일찍 과제를 끝내고 전날부터 발표 내용을 외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발표 실력과 영어 구사력이 한층 나아지 면서 발표할 때의 어색함도 차츰 사라졌다.
3개월의 시간은 정말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꿈꿨던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일한 경험이어서 아주 소중했다. 무엇보다 스토리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사람 들과 함께한 시간이어서 더욱 의미 있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기
인턴십이 끝나고 LA로 내려와 본격적인 취업 활동에 돌입 했다. 인터넷에 스토리보드 아티스트를 입력해 창이 열리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는 모두 지원했다. 그중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연락이 왔고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프로덕션인 트롤 헌터스 시리즈의 위져드 (Wizard) 시리즈에 스토리 리비져니스트로 일을 시작했 다. 스토리 리비져니스트는 기존 스토리보드에서의 문제점 들을 감독과 함께 협력해 고쳐나가는 일을 한다.
일을 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낀 점은 아티스트로서 팀 전체의 작업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일 좋아하는 파트인 스토리보드를 지속적으로 연구할 수있는 점이 좋았다. 위져드 프로덕션에서 일한 후 쥬라기 월드: 백악기 어드벤처 시리즈도 맡았고, 지금은 새로운 시리즈에서 스토리보드 아티스트로 일하고 있다. 매번 더 재미있게 스토리보드를 그리려고 하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하지만 어릴 적 막연히 꿈꿨던 미래가 조금씩 뚜렷해지는 것 같아 노력을 게을리할 수 없다.
애니메이션 유학이나 공부를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실패에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 도전하라고 말하고 싶다. 나도 학생 때부터 디즈니, 드림웍스, 픽사 같은 해외 유명 스튜 디오에 지원하면서 많이 낙방했다. 하지만 인터뷰 면접, 최종 후보 등 경험을 쌓으면서 주위 동료들과 함께 정보를 나누고 노력한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라고 믿는다.
나지영
·홍익대 시각디자인과 졸업(2013)
·링링예술학교 BFA 졸업(2018)
·픽사 스튜디오 스토리보드 인턴십(2018)
·드림웍스 스튜디오 스토리보드 아티스트(2020~)
출처 : 월간 <아이러브캐릭터> 2020.12월호
출처 : <아이러브캐릭터 편집부> (master@ilovecharac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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