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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정인 감독의 신작 <영숙>은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태어나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며 나아갔던 여성 최영숙의 삶을 다룬 애니메이션이다. 2007년 졸업작 품으로 작품을 만들기 시작해 오랫동안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온 라정인 감독은 이제는 주인공의 모습 뒤에 숨기보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자 한다.
독자들에게 소개를 부탁한다.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게된 계기는?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라정인이다. 어려서부터 애니메이션을 좋아해 애니메이션을 직접 만들고 싶었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 한겨레문화센터와 한국영화아카데미 에서 본격적으로 애니메이션에 대해 배우고 만들게 됐다.
최근작 <영숙>은 어떤 작품인가?
<영숙>은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 여성 최초로 경제학사가 됐지만 고국에서 꿈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채 안타깝게 죽은 최영숙이라는 인물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이다. 1906년 조선에서 태어난 최영숙은 중국과 스웨덴 등에서 공부했고, 해외에서 자리를 잡을 수도 있었지만 고국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조선 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고 가세 또한 기울어 있었다. 그녀는 나물을 팔며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여성소비자회를 조직하는 등 자신이 배운 것을 조선의 여성들에게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져 결국 1932년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실존했던 인물 최영숙의 삶을 나름대로 가공한 애니메이션 <영숙>은 2018년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지원사업의 제작지원작으로 선정돼 올해 2월에 완성했다. 이번 12 월 1일부터 10일까지 여성인권영화제에서 온라인 상영을 하는데, 이 기회를 통해 더 많은 이들이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왜 최영숙이라는 인물에 끌렸나?
내가 최영숙을 알게 된것은 EBS에서 방영하는 지식채널e의 방송 화면을 캡처한 글을 통해서였다.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더 전에 태어난 여성이 그토록 용감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리고 이런 진취적인 인물이 이토록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 이렇게 허망하게 잊혀도 되는 사람일 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누군가는 기억해줘야 한다는 생각에 작품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영숙>의 제작 기법 및 과정이 궁금하다
영숙은 디지털 드로잉 애니메이션이다. 연필 스케치로 작화한 배경은 과거의 풍경에 대한 인상을 강하게 주기 위해 최대한 톤을 덜어 내고자 컬러를 제한했다. 그리고 최영숙이란 인물이 가장 행복했을 유학 시절, 인도 체류 시절 등에는 컬러를 좀 더다양하게 넣었고, 이에 비해 힘들었을 조선 체류 시절에는 컬러를 단순화하는 둥 영숙의 감정을 다양한 색으로 표현 하고자 했다. 캐릭터 일러스트는 배경에 비해 심플하게 연출했다. 특히 외곽선을 없앤 이유는 인물을 선에 가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소재로 했던 이전작들에 비교하면 <영숙>은 매우 다른 스타일인데, 변화의 계기가 있었나?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기보다는 내 안의 다양한 관심 들, 감정들이 시나브로 변해왔던 것 같다. <누구나 마음속엔 고양이가 산다>와 <14Beat>는 기획 단계서부터 음악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겠다고 정해놨었다. 다만 두 작품을 끝내고 나서는 ‘이제는 음악에 얽매이지 말자, 장르를 위한 기획은 그만하자’ 고 마음먹고 다양한 장르와 이야기들에 제한을 두지 않기로 했다. 그때 <영숙>의 이야기가 다가 왔던 것이다. 실존 인물이었던 최영숙의 삶을 새로운 이야 기로 가공하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었다. 판타지적인 슈퍼 히어로물로 할까, 진지한 다큐 버전으로 할까 여러 형태를 고민했는데, 결국 최영숙이라는 인물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 픽션과 다큐 사이의 중간점을 택했다.
<14Beat>와 <누구나 마음속엔 고양이가 산다>에서는 음악이 매우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애니메이션에서 음악의 역할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음악을 듣는 걸 워낙 좋아해 음악을 잘 표현한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음악과 애니메이 션은 뗄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14Beat>에서 표현했 듯, 우리의 일상은 소음으로 가득한데 그런 와중에서도 소음만의 리듬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걸 찾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음악이 존재하는 것 같다. 특히 요즘엔 콘텐츠에 있어서 사운드와 음악의 경계가 풀어지는 흐름이 느껴진다. <영숙>을 만들 때도 사운드와 음악의 경계가 그어지지 않도록 신경 썼다. 내 작품 속 음악들은 전부 남편이 감독해준다. 또 프리프로덕션 단계부터 함께 음악을 고민하곤 한다.
<누구나 마음속엔 고양이가 산다>와 <영숙>을 보면 여성 문제에 대한 관심이 발전해온 인상을 받게 된다
생각해보면 <14Beat>에서 남자아이를 주인공으로 세운 것은 작품에나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서 이중, 삼중의 방어막을 치고자 했던 마음이 결정한 일이 아닌가 싶다. 그랬던 것이 <누구나 마음속엔 고양이가 산다>에서는 엄마의 모습을 주인공에 투영시키는 것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최근 몇 년 사이 여성 문제와 관련된 이슈가 화제로 오르는 것을 보며 생각이 바뀌었고, 그 즈음 최영숙을 만나며 여성 문제에 관심이 더 많아졌다. 이제는 자신의 이야기를 자기만의 톤으로 하는 것이 필요한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주장이든, “ 나도 그런 적 있어” 같은 소소한 경험담 이든 상관없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국내 독립 애니메이션 시장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매우 소수의 감독들을 제외하면 독립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이들 중 작품의 판권이나 저작권, 관련 캐릭터 사업 등으로 먹고 사는 이들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끊임없이 외주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는 점이 안타깝다. 하지만 독립 애니메이션협회나 직접 발 벗고 나서는 감독님들을 보면 경제활동의 다양한 활로를 모색하고 있음을 체감할 수 있다. 굿즈를 제작하는 법에 대한 강연이 열린다거나, 웹애니 메이션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고민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나 역시 관심의 촉수를 여러 곳에 펼쳐놓고 정보를 모은다. 당장 눈앞에 뻥 뚫린 길은 없지만, 독립 애니메이 션을 만드는 한 길을 계속 찾아나가야 할 것이다.
향후 작품 계획, 그리고 앞으로의 목표는?
당분간은 좀 더여성들의 이야기에 집중해보고 싶다. 이번에는 지금 시대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예를 들면 우리 엄마라든지. 사람들은 각자 삶의 디테일은 다르지만 인간 으로서 공통적인 부분들을 영위해가지 않나. ‘ 가장 사적인 이야기가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 라는 말처럼, 사적인 이야 기를 통해 개인적이지만 개인적이지만은 않은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일은 정말 좋아해서 시작했지만 업으로 삼고 나니 예전처럼 즐기기는 어렵더 라. 기획이 마음처럼 풀리지 않거나, 어제 만든 장면이 오늘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등등 때로는 자존감이 무너지기도 한다. 하지만 막혔던 부분을 풀어냈을 때의 희열은 어마 어마하다. 애니메이션은 내게 있어서 짝사랑의 대상이다.
애니메이션이 언제 나를 보고 미소를 지어줄지 모르겠 다.(웃음) 그럼에도 언젠가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열광 해줄 만한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포기할 수 없다. 나는 여전히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일을 좋아한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라정인 감독
·<영숙> 2020
·<누구나 마음속엔 고양이가 산다> 2014
·<14 Beat> 2009
·<하루가 저물어가는 시간의 김씨 할아버지> 2007
출처 : 월간 <아이러브캐릭터> 2020.12월호
<아이러브캐릭터 편집부> (master@ilovecharac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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