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훈 감독의 영화편지] 이 영화를 보았더라면, '바람이 전하는 말'

칼럼 / 안재훈 기자 / 2025-11-04 15:30:07
Review

 

실로 놀라운 시대를 살았다는 고마움이 있다. 세상의 모든 분야에서 엄청난 문명의 변화를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그 시절을 이야기하자면 교과서 속 박물관의 물건들과 함께 살아온 세월일 것이다. 음악을 듣는 방식의 변화 또한 그렇다. 언제나 그 시대와 함께하고 있었다.

 

나는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들으며 자랐다. CD와 MP3를 거쳐 뒤늦게 LP를 들으며 내 귀에 대한 미안함을 덜었다. 이후에는 핸드폰과 다양한 기기로 손쉽게 음악을 듣는 시대가 되었다.


언제나 음악은 사람들 곁에서 시대와 개인의 역사로 함께 살아왔다. 그 노래들은 가수를 통해 세상에 전해졌다. 다큐멘터리의 위대한 역할은 존재했던 것들을 말해 주는 데 있다. 위대함 뒤에 숨은 더 위대한 태도를 차분히 들여다보게 하고 등수를 매기지 않는 공부와 같이 지적 즐거움을 준다.

 

김희갑 작곡가님의 “적어도 10여 년을 미쳐야 소질이 있는지 없는지 안다”는 말은 늘 스스로의 능력을 고민하는 나에게 희망을 주는 말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수많은 명곡이 만들어질 때의 집중력과 결과를 보면 결국 김희갑 작곡가님은 천재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양진모 평론가의 말은 천재라는 말보다 더 대단한 지점을 짚어주었다. 김희갑 작곡가님과 양인자 작사가님의 노래를 두고 “배운 언어가 아니라, 지성의 언어가 아니라, 감성적 삶의 언어”라고 표현했다.

 


재능을 넘어 사람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조용필 가수님도 후배 가수님들도 한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이 마음이 다큐멘터리에도 담겨 각자의 직업에서 우리가 지녀야 할 태도와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지금의 K-팝에 이르기까지 한국 대중음악이 오랜 시간 품격을 지켜왔다는 말은 내게도 무척 중요한 의미로 다가온다.

 

훗날 K-애니메이션 시대가 오리라. 그 자리에 내가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단지 김희갑 작곡가님이 ‘향수’라는 앨범을 만들어낼 때의 고민과 노력뿐 아니라 조용필, 혜은이, 송창식 같은 분들을 만나는 행운이 필요하며,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완전히 새로운 시도를 감행할 수 있는 담대한 용기와 깊은 이해가 뒤따라야 한다.

 

모든 직업은 정상에 오르기까지, 내가 그곳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품격을 수호한다’라는 말처럼 태도와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라 믿어야 한다.


영화 ‘바람이 전하는 말’은 역사가 되어간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 과정인지 보여준다. 이 작품은 놀라운 시대를 견디며 놀라운 재능으로 오늘날의 대중가요에 바통을 이어준 김희갑 작곡가님의 이야기이자 그 곁에서 함께한 양인자 작사가님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지금의 K-팝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언젠가 한 번쯤 이들의 이야기를 떠올렸으면 한다. K-팝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그 뒤에는 뿌리가 되어주고 거름이 되어준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가수님들이 역사의 한 부분에서 선대를 존중하며 그 길을 이어가고 있기에 오늘의 K-팝이 더욱 찬란히 빛나고 있는 것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세 가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노래의 탄생,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김희갑 선생님이 차지하는 위치, 그리고 선생님의 삶이다. 그 삶 속에서 동반자이자 작사가인 양인자 선생님을 자연스럽게 소개한다.


노래의 탄생에는 평범함이 없다. 우연조차도 역사적인 순간을 위해 미리 쓰여진 듯하다. 김희갑 작곡가님의 작업실에 우연히 놓여 있던 악보 한 장이 인생곡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한 곡의 노래가 흘러 흘러 누군가를 찾아가기도 한다.

 

 

우리가 노래를 듣는 순간 그 노래는 또다시 각각의 사연이 되지만 하나의 노래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또 다른 수많은 사연이 있었다. 때로는 누군가에게 재기의 신호를 주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신인의 기회를 열어주었다. 그 모든 순간은 단순한 직업적 관계를 넘어 가수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대중음악에서 김희갑 작곡가님의 위치는 미 8군 무대를 통해 다져진 실력을 바탕으로 우리의 정서와 언어로 만든 곡이 어떻게 현 음악의 뿌리가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과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그의 음악은 단지 뿌리로 머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치유와 위로의 열매가 되어주었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김희갑 작곡가님의 태도가 있었다.

 

그 친절하고 다감한 태도는 아내이기도 한 양인자 작사가님과의 첫 만남에 대한 회고에서도 드러난다. 당시 신인이었던 양인자 작사가님에게 건넨 “열심히 해보겠다”는 말은 그동안 내가 들었던 그 어떤 “열심히 하겠습니다”보다 따뜻하고 좋은 말이었다.

 


평론가들의 평 또한 인상적이다. 대중음악 평론가들은 자신이 속한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김희갑 선생님의 삶을 조명했다. 선생님을 수식한 언어의 맛이 참으로 멋있었다. 인상 깊었던 말이 있다. 두 분의 노래에 대해 “우리 인간이 갖고 있는 36.5도라고 하는 온도와 호흡이 맞게”라는 표현이었다. 평론가들의 이야기를 듣는 즐거움이 대단하다. 한국 영화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기자와 평론가들의 역할이 중요했듯 대중음악 평론가들의 말 또한 고맙고 부럽기도 했다. 물론 부러움에 앞서 그들의 말에 걸맞은 결과물을 만들어내야겠지만, 그들의 평은 언어를 위한 언어가 아니라 우리 곁에서 함께해 온 예술가들에 대한 깊은 존경이었다.


선생님은 늘 기타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 마치 내가 연필을 들고 대화를 해야 안심이 되는 것과 같은 마음이 아닐까 공감해 본다. 그리고 선생님의 손톱이 길었다. 투병 중에도 언뜻 보이는 손끝의 길이는 언제든 기타를 칠 수 있다는, 그리고 다시 그렇게 하고 싶다는 준비의 표현 같아 뭉클했다.


이 영화는 자기 직업에 대해 의심하고 자신이 하는 일이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한 것처럼 느껴지는 이들에게 나침판이 되어줄 만하다. 김희갑 선생님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걸어온 직업의 역사를 함께 보게 된다.

 

모두가 자기 시대에 맞는 노래를 가지고 있었고, 그렇게 시대는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그 뿌리가 있었기에 지금 우리는 세상을 향해 우리의 음악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순간을 맞고 있다.

 

그것은 밀어주고 끌어주는 관계라기보다 자신의 청바지와 생맥주, 통기타로 고단한 청춘과 험난한 시대를 위로하던 노래들이 지금은 다른 형태로 더 넓은 세상에서 세계의 청년들을 위로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말로 노래를 만들고 다양한 방식으로 한국 대중음악에 영혼을 남겼다.

 

 

정지용 시인의 ‘향수’를 해석해 만든 김희갑 선생님의 노래에 대해 박성서 평론가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곳인데도 분명 언젠가 가본 것 같은 풍경이 내 눈앞에 있다. 내가 본 것처럼.”

 

‘한국 단편문학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어디에 도달하고자 했는가?’라는 스스로를 향한 질문은 김희갑 작곡가님께서 노래를 만드는 모습 속에 있었다. 우리의 언어와 삶의 음률을 사랑하고 이를 세상에 표현하고자 했던 그의 마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비록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고단하고 불안하고 때로는 버겁더라도 우리는 모두 각자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라고. 양인자 작사가가 쓰고, 김희갑 작곡가가 만들고, 조용필 가수가 노래하며 그렇게 우리를 응원한다.

 

 


당신이 가장 빛나던 시간은 언제였나요? 지나간 시간 속에는 빛나는 청춘이 있고 간절한 꿈이 있고 또 순정한 사랑이 있을 테지요!


‘바람이 전하는 말’을 보는 동안 추억의 노래들을 흥얼거리며 그 찬란한 시절의 자신을 만나시길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인생의 어느 종점에 도착했을 때에도 ‘바람이 전하는 말’의 마지막 가사처럼 “인생이란 따뜻한 거야”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일평생 음악과 함께 살아오는 동안 자신에게는 혹독한 연습벌레였고 타인에게는 한없이 따뜻했던 작곡가 김희갑이 남긴 노래가 당신을 위로해 줄 겁니다.


양희 감독

 

 

 

안재훈 감독
<소중한 날의 꿈>, <아가미>와 한국 단편 문학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메일꽃·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 <소나기>, <무녀도>를 개봉했다. 현재 장편 애니메이션 <영웅본색2>, <시작하는 나의 세계> 연출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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