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V의 대량보급으로 어린이들은 집에서 TV만화영화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당시 TV만화영화는 대부분 미국과 일본에서 제작한 작품들이 주를 이루면서 어린이들은 유머나 영웅 등의 측면에서 편향된 시각을 갖게 됐다. 특히 한국에서 창작된 작품들이 사라지면서 외국 문화가 최고인 것처럼 착각하고 또 열광하게 됐다.
또 다른 문제점도 있었다. 각 방송사들이 국내 애니메이션은 제작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자라나는 어린 세대의 문화적 교육에 기여하는 국내 만화영화 제작에 투자하기 보다는 상업적 논리를 앞세워 값싸고 수입이 쉬운 해외 작품들로 TV를 도배했다.
해외 TV만화영화를 수입, 방영한 당시 상황은 우리 아동들의 정체성에 심각한 상처를 남겼다. 국내 성우에 의해 한국어로 더빙된 대사들과 함께 이름도 한국식으로 개명된 캐릭터가 나와서 한국말로 가사를 바꾼 주제가를 부르는 바람에 마징가 Z가 ‘한국산’ 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더욱이 우리가 그토록 좋아했던 마징가 Z의 조종사는 ‘쇠 돌이’ 가 아니라 ‘카부토 코지’ 였고, 미래소년 코난의 절친 은 ‘포비’ 가 아닌 ‘지무시’ 라는 이름이었다는 사실을 수십 년이 흐르고 어른이 돼서야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또한 일본 <주간 소년 점프>의 연재만화를 원작으로 도쿄무비 신사가 제작하고 일본 후지TV에서 1973년부터 황야의 소년 이사무(원제: 荒野の少年イサム)라는 제목으로 제작, 방영했던 일본 TV만화영화 시리즈는 국내에서는 1975년 1월부터 MBC에서 서부소년 차돌이(총 52화)라는 제목으로 방영하기 시작했다. 감독은 타카하타 이사오, 교스케 미쿠리야, 요시카타 닛타, 코이즈미 겐조였고 스토리보드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맡은 작품이었다.
원작 TV시리즈의 첫 회에는 중국 상하이에 있던 차돌이의 아버지가 미국으로 밀항하는 장면이 있었다. 이 장면에서 차돌이네가 일본인이라는 것이 드러나자 MBC는 이를 숨기려고 초반 장면을 삭제했다. 방송사는 일본 작품임을 알고 있었고 이를 숨기려 한 것이다. 경향신문의 1975년 3월 11일자 기사에서는 이 작품을 미국 워너 브라더스의 작품으로 소개하고 있다. “ 서부극 애니메이션 ‘서부소년 차돌이’는…(중략)…어린이뿐 아니라 어른들도 즐겨보고 있다.…(중략)…서부소년 차돌이는 미국의 워너(Warner Brothers)사가 제작한 장편 서부 만화영화”라고 신문은 밝히고 있다.


한편 예전에 한국과 일본이 축구 경기를 할 때, 한국 측 응원단이 마징가 Z의 노래를 부르는 바람에 일본 측 응원단을 깜짝 놀라게 하고 일본인들의 실소를 자아냈다는 일화가 있다. 우리에게는 아주 익숙한 응원가였으나 일본인들 에게는 그저 애니메이션 주제가였을 뿐이다. 우리는 ‘반 일과 극일’ 을 외치면서도, 일본 애니메이션 노래임을 알지 못한 채 따라 부르고 있었다.
도쿄 대학 대학원의 <금지와 미디어-1970년대 한국 사회 에서 일본 대중문화 금지와 신문, 방송>이란 논문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축구 한일전에서 많은 사람들이 한국산 애니메이션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불렀던 마징가 Z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주제가였던 것이다.
이 논문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 “1970년대의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미디어는 TV였다.
그리고 철완 아톰, 타이거 마스크 등 수많은 애니메이션은 새로운 텔레비전 방송이 만들어낸 대표적인 아동·청소년 문화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것들의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이 작품의 배경과 주인공의 이름 등을 변경해 왜색에 익숙해지도록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TBC(동양 방송)는 매주 수요일 7시부터 새로운 만화 영화 타이거 마스크를 방송한다. …(중략)… 톰 소년의 성공담은 어린이들에게 지혜와 용기를 주는 것이다.(중앙일보, 1971년 2월 17일자)
●당시 다수의 작품이 미국의 것으로 소개되고 있었지만, 나중에 1980년대의 프로축구 팀 포항 아톰즈의 마스코트가 될 정도로 한국에서 사랑받고 있던 철완 아톰처럼 국내 작품으로 소개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축구 한일전에서 응원가로 사용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국산 애니메이션이라고 믿었다. 마징가 Z의 경우 처음에는 미국의 작품으로 소개되었다.
●MBC TV는…(중략)…11일부터 공상과학 만화영화 마징가 Z를 방영한다. 아메리칸 픽처사 제작의 이 작품은 아이들에게 관심과 지혜를 주는 우주과학을 소재로 한 교육적인 영화다. (중앙일보, 1975년 8월 7일자)
●이상의 프로그램 소개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그 평가가 긍정적이었다는 것이다. 많은 애니메이션은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미국(또는 국산)의 것’ 으로 소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부터 그 국적이 하나하나 폭로되면서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애니메이션은 갑자기 ‘왜색 저질 문화’ 의 대표적인 존재로 묘사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제작사가 일본이라는 것을 철저히 숨기기 위해 존재하지도 않는 ‘아메리칸 픽처’ 라는 미국 회사가 제작한것으로 둔갑시켜 방영했다. 이것은 엄연히 국민을 기만한 사기나 다름없었다.


일본 JBpress사의 2019년 5월 22일자 기사는 ‘1980년대 한국의 운동회 일본의 애니 송을 응원가로’ 라는 주제 아래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 한국에서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경쾌한 리듬의 유행가와 애니 송 등이 응원가로 불리고 있었다. 문제는 그 응원가의 대부분이‘일본의 노래’였다는 것이다.…(중략)…80년대 한국에서 유행하던 애니메이션의 대부분은 일본의 애니 송의 멜로디에 한국어 가사를 붙인 것이었다. 가장 논란이 된 곡은 마징가 Z, 미래소년 코난, 은하철도 999 등으로 일본에서도 유명한 곡뿐이거나…(중략)…한국의 소년 소녀들은 그들이 원래 일본의 노래라는 것을 모르고 불렀다. TV에서 방송돼 인기를 얻고 있던 애니메이션이었지만, 주인공들의 이름은 한국인의 이름으로 개명되었고, 노래와 함께 흐르는 엔딩 크레딧에 표시되는 작곡가까지 한국인으로 바꾸었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남국
·전 홍익대 조형대학디자인영상학부 애니메이션 전공교수
·전 월트 디즈니 & 워너 브라더스 스튜디오 감독 및 애니메이터
·국립공주대학교 영상예술대학원 게임멀티미디어학과 공학석사
·CANADA SENECA COLLEGE OF APPLIED ARTS & TECHN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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