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든 반려견을 떠나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인터뷰에 나서기 힘들었다는 그녀는 막상 인터뷰가 시작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극강의 발랄함으로 긍정의 기운을 뿜어냈다. 천상 배우로서의 끼가 넘치는 그녀의 지독한 연기 사랑은 마이크와 무대를 넘나든다.
대표작들을 소개해달라 독자들이 잘 알만한 최근 작품에서 꼽자면 애니메이션 신비아파트의 신비 , 도라에몽의 이슬이가 있다. 또 너에게 닿기를에서 요시다 치즈루 , 슈퍼배드2부터 등장하는 루시 요원 , 코렐라인: 비밀의 문의 주인공 코렐라인 역 등을 맡았다. 현재 넷플릭스에서 제공되는 영화 패신저스(passengers)의 제니퍼 로렌스 역이나 보스 프린세스 , 예스데이 등 국제선 기내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영화에도 참여했다. 실사영화 더빙 기회가 거의 없는 요즘 기내 영화 더빙은 성우에게는 무척 소중한 기회다. 다만 영화를 국제선 비행기를 타야 볼 수 있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웃음)
자신의 목소리가 어떤 캐릭터를 가장 잘 표현한다고 생각하나? 주로 맡은 배역을 살펴보면 활발하고 유머러스하며 개구쟁이 같은 타입이 많다. 또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거나 정신없이 소란스러운 캐릭터도 맡았는데 하이톤의 밝고 활기 넘치는 역할이 많이 주어지는 것 같다. 하지만 게임 오버워치의 파라 , 디아블로3의 여성 마법사 , 리그오브레전드의 퀸 , 이렐리아 등 중저음의 카리스마 있는 캐릭터도 연기했다.
가장 애착이 가는 캐릭터가 있나? 아직까지는 신비아파트의 신비만 한 게 없는 것 같다. 당시 투니버스에 오디션을 보러 갔을 때만 해도 신비아파트가 이렇게까지 큰 인기를 얻을 줄 몰랐다. 캐릭터가 마음에 쏙 들고 연기할 때도 평소 활달한 나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큰 어려움이 없었다. 외국 애니메이션에 우리말을 입히려면 외국 성우의 음성을 들어야 하지만 국산 창작 애니메이션의 경우 아무 소리도 없는 그림만 보고 내 목소리를 넣어 생명을 불어넣어야 하기에 그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만의 소리를 입힌 국산 창작 작품이자 오래도록 사랑받고 있는 신비아파트에 애착이 많다.
성우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를 꼽는다면? 객관적으로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것이다. 나를 바라본 시각으로 남을 보면 사람에 대해 알게 된다. 이것이 연기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나와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없으면 안 된다.
그래야 작품 속 수많은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빠르고 몰입도도 높아진다. 성우는 단순히 마이크 앞에서 글씨를 읽어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형태가 없던 사람을 말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이 같은 생각이 없으면 배역을 빨리 이해하고 몰입해 표현해야 하는 지금의 작업 구조상 대본만 그럴싸하게 읽어 기계적으로 소리를 내는 데 그치기 쉽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전속 성우 기간이 끝나자마자 당시 MBC에서 방영하던 24시란 미국 드라마에서 사랑하는 약혼자를 총으로 쏴 죽이는 범인 역을 맡은 적이있다. 총을 겨누고 울먹이는 감정을 연기해야 하는 슬픈 장면이었다. 나름 감정을 가득 담아 연기하는데 담당 PD가 이유는 알려주지 않은 채 “ 아니야 다시 , 아니야 다시 ” 이러면서 녹음을 자꾸 끊는 것이 아닌가. 연차도 얼마 되지 않는 신인인 데다 뒤에서 하늘 같은 선배들이 나만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라 식은땀이 줄줄 흐르더라. 결국 나중에 나만 남아 수없이 같은 연기를 반복했는데 설움이 북받쳐 끝내 눈물이 터져 나왔다. 목멘 목소리로 대사를 읊었더니 PD가 그제야 비로소 “ 바로 그거야 ” 하며 오케이 사인을 내더라. 그땐 정말 죽을 맛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런 감정을 경험하게 해준 게 고마웠다.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 들 정도로 정말 짜릿했고 너무 값진 기억이다. 그 이후로 연기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연기에 불을 지펴준 그 PD님께 감사드린다.
조현정에게 성우란? 성우는 꿈이었고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고 마침내 실현했다. 하지만 예전에는 그저 성우란 목표를 향해 달렸다면 이제는 어떤 성우가 돼야 할까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그래서 내게 성우는 앞으로도 여전히 이뤄야 할 꿈이다.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자면 숨과 같다.
갑자기 지독한 감기에 걸려 일을 미루거나 그르친 때가 있었다. 그때 문득 “ 이 일이 없었다면 난 뭐하는 사람이었을까 ” 란 생각이 들면서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후 성우로서의 삶을 더욱 감사하게 느낀다. 우리가 숨을 쉬는 것처럼 성우는 내게 평온한 일상이자 날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다.
아이러브캐릭터 / 장진구 기자 master@ilovecharac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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