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서울 인디애니페스트에서 미리내로 관객상을 받은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는 구제역에서 살아남아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돼지와 차라리 짐승이 되기를 꿈꾸는 무력한 인간의 엇갈린 운명에 대한 이야기다. 허범욱 감독은 105분간 이어지는 참혹하면서도 어두운 영상을 통해 동물과 다른 인간다움이란 과연 무엇인지 질문한다. 답을 찾는 건 오로지 관객의 몫이다.
서울독립영화제에서도 수상했던데 소감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한국 장편 경쟁 부문에서 특별언급을 받았을 때만 해도 기쁘면서도 고생한 데 대한 위로 정도로 생각했는데 서울 인디애니페스트에서 이름이 불릴 때는 안심이 되었다. 동료 감독이나 독립 애니메이션 관계자들이 괜찮은 작품이라 평가해준 것 같아서랄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으로 뽑혔을 때는 정말 뛸 듯이 기뻤다. 쟁쟁한 실사 영화들과 겨뤄 장편 애니메이션이 수상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실사 영화와 경쟁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게 내 목표였는데 새로운 역사를 쓴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 의미가 크다. 힘겨웠던 시간이 떠올라 울컥하기도 했다.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건?
2013∼2014년 구제역 파동 당시 돼지를 살처분하는 참혹한 장면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것에서 모티브를 얻어 작품을 기획했다. 동물과 인간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란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누가 더 뛰어난 존재인가를 말하고 싶진 않았다. 돼지와 군인은 대립하는 객체지만 서로의 처지가 비슷한 이 둘은 결국 하나일 것이란 방향으로 이야기를 구성했다. 사실 인간만이 누군가를 해하기 위해 폭력성을 띠지만 타인을 위해 희생하기도 한다. 긍정과 부정적인 면이 혼재돼 있다. 다만 현시대를 반영해야 좋은 작품이란 생각에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인간의 부정적인 면을 좀 더 드러내려고 했다.
애니메이션을 만들기로 결심한 건 언제인가?
고등학교 다닐 때 문학에 빠져 국문학과를 지망했는데 떨어져서 잠시 방황한 적이 있다. 그때 남산 길을 걷다가 우연히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서 열리던 캐나다 국립영화위원회(NFB) 단편 애니메이션 특별 상영회를 보고 애니메이션에 눈을 떴다. 당시 이슈 파텔 감독이 직접 나선 강연을 듣고 내가 보지 못한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 놀라웠다. 군대를 갔다 와서 본격적으로 입시를 준비했다. 한국영화아카데미에 가고 싶었다. 그런데 애니메이션 포트폴리오가 필요했다. 그때 난 그림을 전혀 그리지 못했다. 그래서 그림을 배워 시도해볼 수 있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도전했다. 늦은 나이에 학원에서 고등학생들과 같이 그림 그리는 것부터 배웠다. 하지만 세 번 모두 실패했다. 여기서 그만둘까 했지만 이제는 그림 실력을 갖춰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는 기본 조건을 충족했다는 생각에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진행하는 애니메이션 제작 워크숍을 찾아갔다. 당시 강사가 연상호, 장형윤 감독이었는데 강의를 들으면서 7분짜리 단편 애니메이션을 완성했다. 정말 재밌더라. 하나 더 만들어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그래서 포트폴리오도 생겼으니 이걸 들고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지원했는데 운 좋게도 애니메이션 연출 전공에 합격했다.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 |
애니메이션을 통해 얻는 즐거움은?
한겨레 문화센터 워크숍을 다니면서 만든 단편 평범한 식사(2009)를 만든 그때가 가장 즐거웠던 같다. 그 이후로는 고통의 연속이었다.(웃음) 지금은 모든 걸 하나하나 증명해야 한다. 전보다 더 나은 걸 보여줘야 하니 부담이 크다.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게 일이 되면서 즐거움이 사라졌다. 직업이 된 순간부터 괴로움이 커지는 것 같다. 작품을 끝냈을 때 느끼는 후련함은 잠깐이다. 다음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란 막연한 걱정이 앞선다.
준비 중인 차기작이 있나?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를 오랫동안 작업해서 그런지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작품을 끝내고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감사하게도 여러 국내외 영화제에 선정돼 상영하고, 배급도 알아봐야 해서 신경 쓸 게 많다 보니 힘에 부치더라. 새해부터 새로운 마음가짐과 생각으로 다시 차근차근 준비해보려고 한다. 물론 몇몇 아이템과 아이디어가 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늘 있다.
▲창백한 얼굴들 |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은가?
그간 만든 작품들을 돌이켜보면 어둡고 힘겨운 이야기만 했던 것 같다. 어쩌면 이런 내 생각을 가장 끝까지 밀어붙였던, 최고치로 끌어올렸던 작품이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가 아닐까 한다. 그래서 앞으로는 이런 스타일로 이 이상의 작품을 만들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을 끝으로 내 필모그래피의 1막을 내리고 새롭게 2막을 열어보겠다. 블랙코미디 같은 새로운 장르, 새로운 방식으로 이야기를 보여줄 생각이다. 그 형태가 애니메이션일지 그래픽 노블일지, 실사영화일지는 아직 모르겠다. 기회가 오면 뭐든 해볼 생각이다.
아이러브캐릭터 / 장진구 기자 master@ilovecharac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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