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재 교수와 함께하는 AI 활용 가이드] 마감을 해야 작품이 된다 - 2

칼럼 / 김한재 칼럼니스트 / 2026-10-22 14:00:34
Column

글의 장면을 만화의 장면으로 다시 쓰는 일
김진홍 작가의 <던전에서 골렘을 주워 구조합니다>는 이전부터 웹소설로 쓰던 이야기를 웹툰으로 옮기는 작업이었다. 던전 도시국가, 의무 복무, 던전 브레이커 구조대, 골렘 등 장르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설정이 있었다. 작가는 매체를 바꾸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고 했다. 글로 장면을 상상하는 것과 만화로 장면을 보여주는 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머릿속에 이미지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읽히는 만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웹소설에서는 한 문단 안에 세계의 역사와 인물의 생각, 공간의 분위기를 함께 설명할 수 있다. 독자는 문장을 따라가며 보이지 않는 부분을 상상한다. 

 

그러나 만화에서는 그 정보를 컷과 대사, 인물의 행동, 배경 속 사물로 나누어 보여줘야 한다. 설정을 설명하기 위해 대사가 길어지면 지루해진다. 반대로 그림만 보여주면 독자가 세계의 규칙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중요한 건 모든 정보를 한 번에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지금 알아야 할 정보와 나중에 알아도 되는 정보를 나누어 보여주는 일이다.


김진홍 작가의 <던전에서 골렘을 주워 구조합니다>

 

이런 작업에서 마감은 정보의 우선순위를 정하게 한다. 던전 도시국가의 모든 규칙을 첫 화에서 설명할 수는 없다. 구조대의 조직과 골렘의 기원, 의무 복무의 이유를 한꺼번에 보여주려 하면 만화가 설정집처럼 보일 수 있다. 첫 화에서 독자가 붙잡아야 할 것은 세계의 전체가 아니라 주인공이 당장 마주한 문제여야 한다. 그래야 독자가 주인공에게 몰입하게 될 수 있으니. 이렇게 글로 존재하던 이야기를 만화로 마감한다는 것은 문장을 이미지로 바꾸는 것만이 일이 아닐 것이다. 어떤 정보를 장면으로 만들고, 어떤 설명을 뒤로 미루며, 어떤 순간을 독자의 첫인상으로 선택할 것인지 다시 결정하는 일이다. 매체가 바뀌면 작품은 다시 쓰여야 한다.


실행되지 않은 생각을 하나의 결과물로 만드는 일
드론 작가의 <1만 시간을 기다릴 수 없는 남자>는 34세의 1인 창업자가 동네 자영업자를 위한 음성 기반 AI 서비스 '가게친구'를 만들며 성장하는 이야기다. 창업과 자기계발, 기술에 대한 두려움을 실행으로 바꾸는 과정을 AI툰으로 옮겼다.

 

드론 작가의 <1만 시간을 기다릴 수 없는 남자>

개인의 경험이나 실제 프로젝트를 만화로 만들 때는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창작자에게는 모든 과정이 너무 중요해 보인다는 점이다. 서비스를 떠올린 계기, 기능을 설계한 과정, 실패와 수정, 주변 사람의 반응, 앞으로의 계획까지 모두 작품에 넣고 싶어진다. 그러나 작품의 소재가 된 경험과 작품 자체는 다르다. 작가는 실제 경험이 풍부하다고 해서 서사가 자동으로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만화로 마감하려면 전체 경험 가운데 에피소드 한 편을 움직이는 갈등을 골라야 한다. 무엇을 만들었는지를 설명하는 데에만 집중하지 말고, 그것을 만들려는 주인공이 어디에서 갈등을 겪었고 무엇 때문에 다시 시도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매력적인 캐릭터가 많을수록 모두 등장시키고 싶고, 공들여 만든 공간이 많을수록 전부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원고는 세계관을 소개하는 화보나 캐릭터 목록이 되기 쉽다. 독자는 많은 것을 보지만 누구를 따라가야 하는지는 알기 어려워진다. 설정이 풍부하면서도 당장 필요하지 않은 것을 보여주지 않는 것. 이것 역시 마감의 능력이다. 모든 걸 욕심만큼 다 담으려면 1화 분량이 300컷이 될 수도 있다는 건 농담이 아닐 수 있다. AI가 많은 가능성을 빠르게 꺼내줄수록 창작자는 더 많이 참아야 한다. 보여줄 수 있는 것과 지금 보여주어야 하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과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다르다
장재훈 작가의 <저승학부>는 저승사자의 제자가 된다는 설정과 여러 캐릭터를 바탕으로 한다. AI를 통해 머릿속에서 맴돌던 연출과 비주얼을 빠르게 시각화할 수 있었지만, 세계관을 정리하고 스타일을 유지하며 연출을 보완하는 과정에서는 여전히 사람의 손이 많이 필요하다는 점도 확인했다.

세계관이 큰 작품에서는 AI의 장점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러 인물의 외형과 의상, 저승의 공간, 기묘한 사물과 분위기를 짧은 시간 안에 시험할 수 있다. 이전에는 설정 문장으로만 존재하던 세계가 빠르게 눈앞에 나타난다. 이러고 나니 걱정이 생겼다.

장재훈 작가의 <저승학부> 일부


마감 직전에는 생성보다 독서를 해야 한다
AI툰을 작업하다 보면 마지막까지 이미지를 고치고 싶어질 것이다. 얼굴이 조금 아쉽고, 배경이 덜 화려하며, 손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실제로 수정이 필요한 장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감 직전에는 새로운 이미지를 더 생성하는 것보다 이미 만들어진 원고를 읽는 일이 먼저다. 필자는 마감 전 원고를 세 번 다르게 읽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이 과정은 비단 AI가 아닌 이전에 어떤 작업을 할 때도 같았다)
 

1. 첫 번째는 독자의 속도로 읽어 보기

프롬프트와 채팅창을 닫고 어떤 의도로 이미지를 만들었는지도 잠시 잊자. 독자가 실제로 보게 될 크기와 순서로 처음부터 끝까지 넘겨 본다. 작업자는 장면의 의도를 알고 있기에 부족한 부분을 머릿속으로 자동 보충한다. 그러나 독자는 화면에 보이는 것만 읽는다. 창작자의 설명을 들어야 이해되는 장면이라면 원고 안에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인물이 왜 놀랐는지, 어디로 이동했는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원고 자체에서 읽혀야 한다.

2. 두 번째는 연출자의 눈으로 읽어 보기

이번에는 대사보다 인물과 사물의 움직임을 본다. 같은 인물로 보이는지, 의상과 소품이 유지되는지, 시선과 동선이 이어지는지, 배경의 방향이 갑자기 바뀌지 않는지 살핀다. 여기에서는 근사하거나 아름다운 한 컷에 감탄하기보다 어긋난 컷의 연결을 찾는 게 더 중요하다. 각각은 잘 그려졌지만, 나란히 놓았을 때 연결되지 않는 장면을 찾아야 한다. 필요하다면 이미지를 새로 만드는 대신 일부를 잘라내거나 방향을 바꾸고, 소품을 덧그리거나 컷 순서를 조정할 수도 있다.

3. 세 번째는 저자의 책임으로 읽어 보기

중요한 컷마다 왜 이 장면이어야 하는가를 묻는다. 답이 “AI가 이렇게 만들어 줬는데 그 이미지가 잘 어울리고 멋있었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라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그 결과를 받아들일 이유를 찾거나, 의도에 맞게 수정하거나, 작품에서 덜어내야 한다. 모든 컷에 거창한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선택은 창작자의 기준을 통과해야 한다. 이렇게 세 번의 읽기 과정은 이미지의 기술적 완벽함을 확인하는 검수가 아니라 독자의 이해, 장면의 연속성, 창작자의 선택이 한 편 안에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이다.


완성본이 있어야 비평도 시작된다
AI 작업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직 실험 중이라고 말할 수 있고, 이야기가 끊겨도 결과물을 '테스트'라고 부르기도 쉽고 도구를 시험해 본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캐릭터가 바뀌거나 연출이 어긋나도 기술의 한계로 돌릴 수 있다. 뭔가 핑계를 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완성본(발표 시점)에서는 그런 보호막이 사라진다. 독자는 어떤 프롬프트를 썼는지, 몇 번 다시 생성했는지, 어느 도구에서 오류가 났는지 알지 못할 것이고 알아야 할 이유도 없다. 독자는 캐릭터가 매력적인지, 이야기가 재미있는지, 다음 장면이 궁금한지가 중요하다. 완성. 이 지점부터 결과물은 기술 시연이 아니라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불편한 일이지만 꼭 필요한 변화다. 고정된 버전이 있어야 구체적인 피드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완성본은 창작자의 능력을 최종 판정하는 시험지가 아니다. 다음 작품을 더 정확하게 만들기 위한 기준점이 된다.

첫 작품에서 캐릭터가 흔들렸다면 다음 작품에서는 디자인을 더 일찍 고정하게 된다. 설명이 길었다면 다음에는 그림으로 보여줄 장면을 먼저 찾게 된다. 세계관을 너무 많이 펼쳤다면 다음에는 첫 화가 감당할 범위를 줄이게 된다. 이 배움은 완성하지 않은 작업에서는 얻기 어렵다. 가능성 속에서는 모든 문제가 아직 고칠 수 있는 일로 남지만, 완성본에서는 무엇이 실제 문제였는지가 드러난다.


마감은 창작자의 이름을 붙이는 일이다
AI 도구는 앞으로 더 빨라질 것이다. 캐릭터와 배경의 일관성도 좋아지고, 컷 연결과 말풍선 배치까지 자동으로 처리하는 기능도 늘어날 것이다. 지금 작가가 오래 붙잡고 있는 작업 가운데 상당수는 언젠가 더 간단해질 수 있다.

그러나 도구가 발전한다고 해서 시간이 더 빨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선택의 문제가 사라지지는 않는 한. 오히려 만들어 볼 수 있는 장면과 스타일, 연출의 수가 늘어날수록 어느 지점에서 멈출 것인지 결정하는 일이 더 중요해지므로 생성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마감은 기술적인 제한 때문이 아니라 창작자의 태도에서 결정이 될 것이다.

마감은 아쉬운 상태에서 억지로 작업을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자신이 선택한 장면과 순서와 결말을 인수하는 일이다. 이보다 더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약속된 시간에(특히 연재물이라면) 독자에게 건네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그 결정이 없다면 화면에는 계속해서 이미지가 쌓일 뿐, 작품은 남지 않을 것이다.

안병인 작가의 회사 괴담에서는 자동으로 만들어진 결과를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가 문제가 되었다. 스펜서 작가의 생활 코미디에서는 헬멧과 시선처럼 작은 연속성이 만화의 호흡을 결정했다. 김진홍 작가의 던전 판타지에서는 글의 정보를 컷의 정보로 다시 나누어야 했다. 드론 작가의 창업 성장물에서는 머릿속 계획을 실제로 읽을 수 있는 결과물로 줄여야 했다. 장재훈 작가의 저승 세계관에서는 보여줄 수 있는 수많은 설정 가운데 첫 화에 필요한 것만 남겨야 했다.

서로 다른 작품이었지만, 마감 앞에서 만난 질문은 같았다. 무엇을 더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지금까지 만든 것 가운데 무엇을 내 작품으로 남길 것인가. AI와 함께 이미지를 생성할 수는 있다. 전체 형태를 빠르게 만들 수도 있고, 이전보다 훨씬 많은 가능성을 시험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편의 경계를 긋고, 이 장면 다음에 저 장면이 와야 하는 이유를 정하고, 더 만들 수 있는데도 여기까지를 독자에게 건네는 순간에는 창작자의 이름이 필요하다. 뜨거웠던 여름, 열심히 스터디했던 소회를 공유하고자 이 글을 남긴다.


김한재
· 강동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콘텐츠과 교수
· 애니메이션산업, 캐릭터산업, 만화산업백서 집필진
· 저서: 생성형 AI로 웹툰 · 만화 제작하기(2024) 외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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