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업계를 떠나는 이들이 늘고 있다. 불투명한 비전, 강도 높은 노동량, 낮은 처우 탓에 애니메이션의 길을 선택하는 이들도 줄고 있다. 그럼에도 어디선가 오늘도 묵묵히 구슬땀을 흘리며 작품을 만들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하는 PD들이 있기에 한국 애니메이션의 미래는 여전히 밝다. 현장의 PD들을 만나 애니메이션을 향한 그들의 꿈과 열정, 그리고 장인정신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간략한 소개를 부탁한다
애니메이션 업계에 발을 들인 지 어느덧 20년이 넘었다. 제작 코디네이터로 시작해 제작 PD를 거쳐 해외 외주 제작과 투자 · 배급, 캐릭터 비즈니스까지 다양한 일을 해왔다. 한 가지 일을 꾸준히 해왔다기보다 애니메이션이라는 큰 틀 안에서 그때그때 필요한 일을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요새는 좋은 IP를 기획하고, 국내외에서 어떻게 사업화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일이 많다. 제작 현장을 경험했던 게 큰 자산이 됐다.
원래 애니메이션 PD를 꿈꿨나?
사실 전혀 없었다.(웃음) 그냥 주어진 일을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중대 영화학과를 졸업할 당시만 해도 CG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나도 CG를 배우고 싶어 디지털드림스튜디오에 들어갔다. 3D 애니메이션 제작사였는데 그때 규모가 좀 컸다. 입사해서 한 6개월은 제작에 필요한 모든 문서를 출력하고 복사해 각 파트에 전달하는 게 내 일의 전부였는데 1년쯤 지나니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회사에서 외주를 준 인도 스튜디오에 파견하려던 PD 한 분이 갑자기 못 가게 되자 나보고 가라더라. 결혼한 지 딱 일주일 지났을 때였다.(웃음) 다행히 아내와 함께 갈 수 있었는데 돌이켜보면 인도 방갈로에서 보낸 1년이 내 인생과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경험 중 하나였다. 이후 DR무비를 거쳐 부즈에서 10년 동안 캐릭터, 애니메이션 제작은 물론 글로벌 투자 · 배급, 라이선싱 등 다양한 비즈니스를 경험했다. 애니메이션 PD를 꿈꾼 적은 없지만, 여러 우연과 선택이 쌓이면서 20년 넘게 이 일을 하고 있다.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을 꼽는다면?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 중 하나는 부즈에서 진행한 <묘&가>다. 토끼와 거북이 설화를 바탕으로 한 3D 애니메이션인데 당시 디즈니의 투자가 거의 확정됐다가 막판에 틀어져 무산되고 말았다. <캐니멀>은 캐릭터 기획 당시 직접 참여한 작품인데 캐릭터 부문에서 대통령상을 받아서 의미가 남다르다. 최근 방영에 들어간 <소망요정 몽글리>에 대한 기대도 크다. 아이돌을 꿈꾸는 소녀 메일리와 요정들의 우정을 그린 작품인데 확 떠서 시리즈가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

작품을 만들면서 뿌듯한 순간, 아쉬운 순간은 언제인가?
우리가 기획해 만든 작품을 아이들이 좋아해 줄 때 가장 뿌듯하다. 딸이 어릴 적에 친구들에게 "우리 아빠가 <캐니멀> 만든 사람"이라고 자랑했다가 다들 안 믿길래 인형을 쫙 다 나눠 주니 그제야 믿더라며 신나서 얘기하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내가 만든 캐릭터가 화면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실제 아이들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이 얼마나 특별한지 그때 다시 한번 느꼈다. 아쉬운 순간이라면, 좋은 작품이나 캐릭터를 만들고도 충분히 알리고 확장하지 못했을 때다. 애니메이션은 제작만 잘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방송, 캐릭터, 완구, 라이선싱, 해외 사업 등 다양한 분야가 함께 맞물려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동력은?

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장르나 이야기가 있다면?
그동안 주로 어린이와 가족 타깃의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제 내 아이들이 10대가 되니 나도 자연스럽게 청소년들이 어떤 콘텐츠를 좋아하는지 관심을 두게 된다. 최근에는 웹툰 IP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는 사례도 늘고 있어 타깃층이 10대 이상인 웹툰 기반 애니메이션을 한번 만들어 보고 싶다. 키즈 애니메이션이 캐릭터 매력과 반복적인 재미가 중요하다면, 청소년 타깃 콘텐츠는 이야기와 세계관, 캐릭터 간 관계와 성장 같은 요소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좀 더 넓은 연령층이 공감하는 콘텐츠 제작에도 도전해 보고 싶다. 난 처음부터 이 길을 선택했던 사람은 아니다. 복사기 앞에서 시작해 렌더팜(렌더링 시간 단축을 위해 여러 대의 고성능 컴퓨터로 연산하는 시스템)을 지키고, 인도에서 신혼생활을 하며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캐릭터와 글로벌 비즈니스를 경험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앞으로 어떤 작품과 어떤 인연이 기다리고 있을진 모르지만, 새로운 기회가 찾아오면 재미있게 한번 부딪쳐 보겠다.
아이러브캐릭터 / 장진구 기자 master@ilovecharac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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