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훈 감독의 영화편지] 이 영화를 보았더라면, '봄밤'

칼럼 / 안재훈 기자 / 2025-07-04 14:00:54
Review

 

나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릴 때가 있다. 개인적인 공간에서는 그냥 넘어갈 일이지만, 스튜디오에서는 스스로 깜짝 놀라 멈추곤 한다. 그리고 문득 생각한다. 내가 왜 노래를 흥얼거리게 되었을까? 지금 내 마음의 상태나 내가 하고 있는 작업과는 무관한, 말 그대로 무의식에서 흘러나온 노래인 것이다. 물론 최근에 우연히 접한 노래를 아무 이유 없이 부르는 경우도 있다.


‘봄밤’속의 영경은 시 구절을 중얼거린다. 그 시에 담긴 삶의 태도는 어떤 미련이나 욕망에 따른 목표가 아니라 자각에 의한 정신의 중심에 기반한 삶의 태도다. 그러나 정작 영화 속 주인공들은 무의식의 노래처럼 소멸되어 가는 길을 택한다.

 


가끔 “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면 장난 아닐 거야”라는 말을 듣는다. 그 말은 지나온 과정을 존중하는 마음이자, 살아내려는 의지에서 비롯된 말 같다.


영화 속 영경과 수환은 각기 다른 상처의 끝에서 만난다. 주변을 둘러보면, 이런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어쩌면 듣기조차 꺼려질 수 있는 이야기 영화는 왜 들추어내는 것일까.

 

알코올중독자가 된 영경의 상처는 배신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배신에 분명한 원인은 없는 것 같다. 수환이 겪은 배신은 인간에 대한 희망을 잃게 한다. 하던 일의 실패는 마치 정성이라는 마음만으로 무언가를 이루고자 했지만 결국 실패하는 예술가와 닮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만난다. 술로 인해 부어가는 얼굴의 영경과 삶의 의지가 꺾여 야윈 수환. 영화는 이 두 사람의 안쓰러운 사랑 이야기다.

 


‘소나기’의 소년과 소녀는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한쪽을 떠나보낸다. ‘봄밤‘ 주인공들이 느끼는 감정은 어떤 감정인지 스스로 알고 있기에 더욱 애절하다.

 

술자리에서 듣는 개인사와 극장에 앉아 어렵게 듣는 개인사는 영화 속 장면처럼 우리에게 문득 목련을 맞이하는 순간을 주는 건 아닐까.

 

목련의 꽃말은 숭고한 사랑, 고귀함, 은혜, 자연애라 한다.
감독이 제주의 또 다른 모습을 담고자 한 의도 역시 이 꽃말에 있는 듯하다. 이처럼 간단한 언어로 말하면 다소 낯간지럽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김수영 시인의 ‘봄밤’과 함께 이 영화를 만났으면 한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울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영경을 연기한 배우 한예리 님의 긴 눈물 장면으로 시작해 혼자 술을 따라 마시는 장면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단단해지려는 사람의 모습인 것만 같았다. 무너져 가는 사람이 읊조릴 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장면을 본 내게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가 건네는 진심 어린 말처럼 들렸다.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영경은 수없이 술을 마시고 술에서 깬다. 수환은 주저앉은 자신의 육체처럼, 사람에 대한 희망이 없는 것처럼 살아간다. 술을 마시지 않을 뿐 마치 술에 중독된 사람처럼 보인다.

 

“너의 꿈이 달의 혜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요양원 길목의 장면에서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영경과, 그녀에게 다가가려 하지만 병으로 몸을 일으킬 수 없는 수환이 나온다. 기어서, 굴러서, 서로에게 다가온 둘은 서로의 힘으로도, 서로의 의지로도 결국 일어서지 못한다.

 

 

그리하여 바닥에 엉덩이를 붙인 채 서로를 부둥켜안는다. 사랑의 힘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것, 결국은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이 둘이 기거하는 요양원의 병실을 ‘방’이라고 부르며 좋아한다. 그 정신 승리의 단어는 국어 선생님이었기에 가능한 표현 같기도 하다. 고단함과 불안함을 품은 ‘봄밤’만큼이나 강렬했다. 집도 아니고 병실도 아닌 방. 가난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축복 같기도 한 말. 외워두기로 했다. 언젠가 내가 눕게 될 병원의 공간을 그렇게 부르기 위해서.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이여.”


이 영화는 의지가 되지도, 위로를 건네지도 않는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건 향기도, 냄새도 아니다. 적합한 사람을 만났음에도 지팡이가 되어주지 못하고 사랑이라는 말 대신 쓰다듬기를 반복한다. 아무 때나 터지는 영경의 울음은 행복할 때 문득 나오는 미소처럼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모든 사람이 아픔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주저앉지도 않는다.


그저 혹시라도 찾아올지 모를 불행 앞에 영경과 수환 같은 사람을 만났으면 한다. 혹시라도 불행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이미 곁에 영경과 수환 같은 사람이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봄밤’이라는 영화를 음악처럼 앞에 두고 목련꽃의 꽃말을 떠올렸으면 한다. 이 영화는 단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는 영화가 될 것이다.

 


애니메이션에서 ‘걷는 작화’는 표현의 한계 안에서 자기만의 빛깔을 찾아야 하기에 항상 걷는 사람을 유심히 보게 된다. ‘봄밤’의 배우 한예리 님은 걷는 동작만으로도 말을 한다. 불안과 포기, 그럼에도 똑바로 걷고 싶어 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배우 김설진 님이 연기한 수환은 포기를 야위어가는 육체로 표현해 낸다.


한 편의 시 같은 영화를 보며 삶에 대해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생각해 보고 싶은 분들께 추천한다. 이 영화를 보았더라면 내 주변의 아픈 마음을 좀 더 들여다볼 수 있었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촬영을 하면서 한 번, 편집을 하면서 한 번, 이 영화가, 제가 뭐라고 표현할 순 없지만 어떤 삶의‘비의’를 건드리고 있다는 걸 강하게 느꼈다. 그게 무엇인진 모르겠지만 그것을 놓지 않으려고 끝까지 노력했다. ‘봄밤‘을 보신 관객 중에 가끔 우는 분이 있다. ‘아, 내가 놓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 이렇게 관객과 만나는구나…’라는 것을 느낀다. 그런 순간을 겪을 때마다 날 이렇게 응원해 주곤 했다. 미자야 애썼다. 영화를 봐주신 관객 한 분 한 분에게 감사드리겠다.

강미자 감독
 

 

 


안재훈 감독
<소중한 날의 꿈>, <아가미>와 한국 단편 문학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메일꽃·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 <소나기>, <무녀도>를 개봉했다. 현재 장편 애니메이션 <영웅본색2>, <시작하는 나의 세계> 연출을 맡고 있다.

[ⓒ 아이러브캐릭터.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뉴스댓글 >

S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