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구 기자
master@ilovecharacter.com | 2026-05-04 08:00:04
애니메이션에 대한 투자 위험을 줄이고 수익 모델을 다변화하는 방안으로 한국형 제작위원회가 떠오르고 있다. 제작위원회는 여러 사업 주체와 투자자가 제작비를 분담해 권리를 나누는 임의조합이다. 일본에서 자리 잡은 콘텐츠 제작·유통·비즈니스 방식인데 자금을 안정적으로 조달하면서 수익을 극대화하는 효과가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K-콘텐츠 산업의 도약을 위한 신전략, 한국형 제작위원회’보고서를 통해 국내 현실을 짚고 활성화 과제를 제시했다.
확장·진화 중인 일본 제작위원회
일본의 제작위원회는 여러 기업이 출자해 구성된다. 방송사, 출판사, 제작사, 배급사, 음반사, 완구사, 게임사, 광고회사, 플랫폼 사업자 등이 출자자로 참여한다. 출자 비율에 따라 IP 이용권과 수익 배분 권리를 갖는다.
여러 기업이 동시에 참여하므로 자금 관리, 계약 체결, 권리 귀속 조정, 수익 분배 등 실무를 총괄하는 주체로 ‘간사회사’를 지정한다. 이는 계약과 책임 주체로서 위원회를 대표한다.
제작위원회는 방송 편성, 극장 상영, 패키지 판매, 스트리밍 서비스, 해외 판권, 캐릭터 상품, 게임화, 음원 사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수익이 발생하도록 설계한다. 이를 통해 일부에서 성과가 부진하더라도 다른 영역의 수익으로 전체 손익을 보완한다. 또 제작 초기부터 IP 장기 개발 전략을 세워 개별 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대규모 프랜차이즈를 기획할 수도 있다.
일본에서는 만화, 라이트노벨 원작을 TV시리즈, 극장판, 게임, 완구, 음악 등으로 확장하는 미디어믹스 전략이 보편화돼 있다. 최근에는 나 혼자만 레벨업, 도굴왕, 전지적 독자 시점 등의 사례에서 보듯 넷플릭스, 크런치롤 등 글로벌 플랫폼이 제작위원회에 투자자로 참여하거나 제작 단계부터 공동 기획에 관여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IP 운영 방식이 제작-유통-마케팅-해외 팬덤 형성을 하나의 사업 구조로 통합하는 방식으로 확장·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애니메이션은 팬덤을 형성해 장기 시리즈, 극장판 연작, 해외 배급 사업을 추진할 수 있지만 초기 흥행 실패 위험도 큰 장르다. 제작위원회는 이러한 불확실성을 분산시키면서 장기적으로 IP를 키울 수 있는 제도적 장치로 뿌리내렸다.
사업자별로 안정적인 분업화가 이뤄졌고 기획, 제작, 마케팅, 라이선싱, 해외 세일즈 등 분야별 전문가 그룹이 자리 잡으면서 꾸준히 신작을 공급하고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용두사미로 끝난 스타 프로젝트 발굴 사업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비슷한 방식을 도입한 적이 있다. 2002∼2007년 당시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이 추진한 스타 프로젝트 발굴 사업은 제작 단계부터 OSMU를 전제로 분야별 콘텐츠 제작을 지원한 첫 사례다. 기업의 자금 관리를 전담하는 자금관리단과 법률, 배급에 관한 전문 자문단을 구성하는 등 제작 전 과정에 대한 지원 체계를 마련했다.
하지만 2005년 국정감사에서 잦은 사업 변경과 협약 해지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고, 2008년 애니메이션 우수 파일럿 사업과 통합해 글로벌 애니메이션 프로젝트로 개편하면서 스타 프로젝트 발굴 사업은 폐지됐다.
이 사업을 거쳐 빛을 본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뽀롱뽀롱 뽀로로가 있다. 초기 제작 구조는 아이코닉스(기획·제작), 오콘(제작), EBS(방영), SK브로드밴드(투자·유통) 등 여러 기업이 참여한 형태였다. 그러나 저작권 귀속, 공동저작물 인정 여부를 둘러싸고 분쟁이 일면서 참여 기업들 사이에 갈등이 불거졌다. 명확한 역할과 권리, 책임에 대한 설정 없이 운영한 게 화근이었다.
결국 정부가 대규모 예산을 들여 추진한 공동 제작·투자 모델은 단발성 프로젝트에 그치며 소리 소문 없이 자취를 감췄다.
현재 운영 중인 문화산업전문회사 제도는 공동 제작·투자 모델과 비슷하다. 특정 콘텐츠 프로젝트의 제작·투자·수익 배분을 위해 설립하는 특수목적회사(SPC)로 자금 관리의 투명성을 높이고 투자 위험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프로젝트가 끝나면 해산한다. 다만 이 제도는 IP 비즈니스보다 제작비 공동 조달과 흥행 실패에 따른 손실 방지에 초점이 맞춰져 제작위원회와 성격이 조금 다르다.
자금 조달 대안 모델로 다시 주목
일본 제작위원회는 버블 경제 붕괴 이후 자금 조달 환경이 변화하면서 단일 제작사 중심의 투자 구조로는 위험부담을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등장한 IP 비즈니스 모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수익성이 악화하고 투자의 씨가 마르면서 그간 해오던 자금 조달 방식이 이제는 한계에 부딪혔다. 그러니 정부 지원사업에 대한 의존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제작위원회는 이러한 흐름에서 대안 모델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제작위원회는 제작비 규모가 크고 흥행이나 상품 판매 성과에 따라 수익 변동성이 큰 장르인 애니메이션에 매우 적합하다. 그렇다고 일본처럼 운영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나라의 제작·투자 현실과 구조에 맞춰 모델을 재구성해야 한다.
한국형 제작위원회를 도입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국내 기업만 참여한다면 성공 가능성이 떨어지므로 글로벌 기업의 참여를 끌어내야 한다. 국산 애니메이션의 제작·유통 경쟁력은 구조적인 한계가 있으니 글로벌 유통사나 해외 파트너사 참여는 필수다.
이때 발생할 갈등이나 문제를 예측해 조정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게 필요하다. 제작위원회에서 기업마다 갖는 지분율은 수익 및 사업권 배분과 직결된다. 여러 나라의 기업이 참여하면 문화와 경험 차이로 인한 마찰이 빚어질 수 있다.
국내에서 일정 제작비를 회수할 수 있는 구조가 빈약한 것도 문제다. 내수 시장 규모가 작고 라이선싱 매출 기반이 약하기 때문이다. 국산 애니메이션에 대한 해외 선호도도 낮다. 해외에서는 여전히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신뢰도가 높다.
따라서 한국형 제작위원회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수익성 개선이란 과제 해결이 급선무다. 수익화 가능성이 낮거나 IP 활용 경로가 명확하지 않으면 사실상 운영이 어렵다. 그러므로 초기 단계에서 사업 모델 기획을 병행해야 한다. 투자 구조의 안정성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정부의 정책적 마중물 지원 필요
이러한 조건은 당장 충족시키기 어렵다. 시장에 맡겨놔도 해결될 리 만무하다. 그래서 한국형 제작위원회 구성은 정부가 주도하는 게 바람직하다.
제작위원회는 간사회사와 제작사가 주도해 단계적으로 구성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는 정부 지원 시스템이 우수해 제작비 등을 단계적으로 지원한다면 구성에 탄력을 받을 수 있다.
이때 정부는 기업 간 협업을 촉진하는 중개자, 조정자 역할이어야 한다. 매칭이나 네트워킹 중심의 일회성 지원은 효과가 낮다. 지속 가능한 협력 구조를 만들어 가려면 기획·개발, 투자 매칭, 세제 지원으로 이어지는 체계적인 정책을 제시해야 한다.
지원사업을 설계할 때 해외 유통사 참여를 허용하고 초기 개발비나 시범 제작비를 지원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
IP 기반 펀드를 조성하고 글로벌 협상 경험이 풍부한 인력 풀도 갖추도록 해야 한다. 특히 1∼2년에 불과한 단기 운영보다 최소 10년 단위의 장기 프로젝트가 되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렇다면 한국형 제작위원회는 어떻게 구성해야 할까. 단순 공동제작 구조가 아니라 IP 활용 성과 확대와 제작 리스크 분산을 전제로 한 지분 투자 방식의 구조로 짜야 한다. 투자는 IP 가치 상승에 따른 중장기적 수익 회수를 목표로 해야 한다.
참여 주체도 산업 환경과 콘텐츠 유형에 따라 유연하게 구성해야 한다. 제작사에 한정하지 않고 유통사, 플랫폼, 라이선싱, 연관 산업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해외 유통·투자 주체 참여를 적극 유도해야 한다.
참여 주체 간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투명한 운영을 위한 간사회사 도입은 핵심 전제다. 투자금 관리, IP 권리 관리, 수익 배분, 의사결정 구조를 통합 관리할 주체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콘텐츠 IP 비즈니스 패키지 지원사업 신설 추진
한국형 제작위원회가 자리 잡으려면 정책적 마중물 지원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콘진원은 내년에 콘텐츠 IP 비즈니스 패키지 지원사업 신설을 추진한다. 콘텐츠 기획개발 단계부터 IP 비즈니스 구조를 함께 설계하도록 유도해 새 판짜기를 이끈다는 전략이다. 기존 지원사업이 제작비에 초점을 맞췄다면, 앞으로는 IP 프로젝트의 기획·사업화·투자 구조를 설계하는 데 중점을 둬 패러다임을 바꾸겠다는 의지다.
이 사업은 제작위원회에 직접 지원하는 정책이라기보다 제작위원회형 협업 구조를 형성할 환경을 조성하는 정책에 가깝다. 콘진원은 “IP 프로젝트의 기획개발 단계에서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프로젝트를 발전시켜 나가는 단계까지 지원해 한국형 제작위원회 출범을 돕는 사업”이라고 설명했다.
컨소시엄을 구성할 때는 프로젝트를 총괄·관리하는 역량 있는 간사회사를 선정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 통해 개발한 프로젝트는 장르별 지원사업을 통해 제작비를 지원받고 보증을 통한 융자, 정부 펀드를 통한 투자를 받을 수 있는 구조도 만들 필요가 있다.
콘진원은 “한국형 제작위원회는 장기적으로 IP 프로젝트가 단발성 수익에 그치지 않고 반복적·지속적으로 활용되는 구조를 만들어 K-콘텐츠 산업의 체질을 개선할 모델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아이러브캐릭터 / 장진구 기자 master@ilovecharac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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