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구 기자
master@ilovecharacter.com | 2025-01-17 08:00:12
애니메이션업계를 떠나는 이들이 늘고 있다. 불투명한 비전, 강도 높은 노동량, 낮은 처우 탓에 애니메이션의 길을 선택하는 이들도 줄고 있다. 그럼에도 어디선가 오늘도 묵묵히 구슬땀을 흘리며 작품을 만들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하는 PD들이 있기에 한국 애니메이션의 미래는 여전히 밝다. 현장의 PD들을 만나 애니메이션을 향한 그들의 꿈과 열정, 그리고 장인 정신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간략한 소개를 부탁드린다
애니메이션계에 들어온 지 어느덧 20년째다. 2005년 디알무비에서 열 달 정도 일하다 이듬해 일본의 매드하우스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프로덕션 IG, 오렌지에서 일하면서 17년 넘게 일본에 머물렀다. 한국에 돌아와야 할 일이 생겼을 때 마침 스튜디오미르의 제안을 받아 합류했다.
원래 애니메이션 PD를 꿈꿨나?
그저 애니메이션이 좋았다. 1997년 곤 사토시 감독이 만든 퍼펙트 블루란 작품을 보고 나서 ‘내 갈 길이 이거다’라고 결심했다. 그때 동국대 공대를 다니고 있었는데 자퇴하고 2년간 입시 미술을 준비한 끝에 2001년 세종대 애니메이션학과에 들어갔다. 처음부터 PD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다. 매드하우스에서 일할 때는 감독이 되고 싶어 연출을 공부했다. 프로덕션 IG로 옮긴 이후부터 PD에 매진했다. 해보니 PD도 감독과 다르지 않더라. PD는 감독과 2인 3각으로 호흡을 맞춰 작품을 만들어가는 하나의 큰 축이다. PD는 감독이 머릿속에 그린 생각을 눈에 보이게 실현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을 꼽는다면?
하나는 비스타즈란 작품이다. 오렌지에 있을 때 1·2기 제작을 이끌었다. 시나리오 각색 작업에만 6년이 걸렸다. 작품을 만들면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공들인 만큼 애정이 크다. 엊그제 전 세계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파이널 시즌은 시나리오 작업에만 참여했는데 어떻게 나왔는지 무척 궁금하다. 설정 코디네이터로 참여한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란 작품에도 애착이 간다. 제작진의 호흡이 좋았고 이미지 표현이나 연출에 제약이 없을 정도로 마음껏 상상하면서 작업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2010년 일본 문화청의 미디어 예술제에서 대상, 2011년 도쿄 국제 아니메 페어에서 TV 애니메이션 부문 우수작품상을 수상해 작품성도 인정받았다.
작품을 만들면서 가장 뿌듯한 순간, 아쉬웠던 순간은 언제였나?
뿌듯한 순간이라면 참여한 작품이 방영됐을 때, 그리고 좋은 평가를 받았을 때가 아닐까. 특히 유명하지 않았던 원작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는데 팬들의 반응이 뜨거울 때 짜릿하다. 하지만 기획을 마친 프로젝트가 좌초할 때, 돈이 되는 작품에만 투자가 몰리는 걸 보면 씁쓸하다. 일본에서 치정 관계에 얽힌 끔찍한 살인 사건이 있었는데 어느 애니메이션의 내용과 비슷한 것 같아 굉장히 놀랐다. ‘아무리 인기를 좇는다 해도 어떻게 이런 걸 만들 수 있지?’하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동력은 무엇인가?
앞서 말한 퍼펙트 블루를 보면 마지막에 주인공(미마)을 죽이려 다른 여자(또 다른 미마)가 뒤를 쫓는다. 추격 신에 나오는 이 여자의 움직임은 현실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것인데 내겐 현실처럼 다가왔고 현실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다. 만약 실사 영화에서 여자가 그런 움직임을 보였다면 긴장감을 떨어뜨리고 맥 빠지게 했을 것이다. 이 장면을 보고 애니메이션에서는 표현하는 형태나 방법에 한계가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내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날 지금까지 이곳에 머무르게 하고 있다.
앞으로 해보고 싶은 장르나 이야기가 있는가?
자이언트 로보, 천원돌파 그렌라간 같은 열혈물을 만들어보고 싶다. 홍콩 누아르나 무협물처럼 뜨거운 기운을 뿜어내고 피가 끓어오르는 작품이랄까. 홍콩 배우 주성치가 나오는 영화를 좋아한다. 실패한 자의 성공담, 한계를 이겨내는 이야기에 끌린다. 피구왕 통키나 슬램덩크가 인기를 끌자 피구와 농구하는 사람이 늘어난 것처럼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여 행동과 삶으로 생각이 옮겨지게 하는 그런 작품을 해보고 싶다.
아이러브캐릭터 / 장진구 기자 master@ilovecharac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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