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TVA, 작품성 높은 비결은 아티스트에 대한 존중과 배려, 김동연

Special Report

김동연 작가

master@ilovecharacter.com | 2023-01-24 11:00:15

지난 호에서 미국의 스톱모션애니메이션 제작사 라이카 스튜디오의 한국인 스토리보드 작가 기고문을 실은 데 이어 이번에는 디즈니TV 애니메이션팀과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김동연 작가가 보내온 글을 소개한다. 이를 통해 작품 제작에 관한 디즈니의 철학과 문화, 그리고 요즘 미국 애니메이션업계의 분위기를 엿본다.

 

미국 애니메이션업계의 철학과 나의 경험
애니메이션이 예술 분야의 하나인 만큼 회사는 채용할 때 당연히 능력 있는 아티스트를 선호한다. 미국에서는 아티스트가 구직을 위해 회사에 이력서를 넣는 방식으로 채용되기도 하지만 회사가 니즈에 맞는 인재를 발굴하고자 직접 연락해 채용하기도 한다. 게다가 회사의 입맛에 맞는 아티스트라면 경력이 채용에 큰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다.
내가 디즈니 TVA에서 메일을 받은 건 지난 7월이었다. 당시 쉐도우 머신이라는 작은 인디 스튜디오에서 애플TV가 스트리밍할 예정인 애니메이션의 백그라운드 페인터로 일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 인스타그램에서 포트폴리오를 봤고 그림이 마음에 들어 먼저 협업을 제안했다.
그들이 처음 제시한 프로젝트 이름을 듣고 협업을 권유받았을 때 깜짝 놀랐다. 그 프로젝트에 대한 소식을 어디에서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프로젝트는 매우 초기 단계에 있었으므로 정보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들은 내 그림의 예술성과 작품성이 해당 프로젝트에 부합한다고 생각했기에 채용 공고를 올리기 전에 먼저 협업을 제안했고 덕분에 난 디즈니와 일할 기회를 얻게 됐다.
초기 단계였던 만큼 확실하게 정해진 콘셉트는 그리 많지 않았다.(정확히는 내가 그 콘셉트를 잡는 단계의 일을 하고 있었다). 캐릭터 모습과 그들이 구상한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 정도만 준비돼 있었을 뿐이었다. 다채로운 색감과 빛을 표현해내는 능력에 나만의 상상력과 아이디어를 더해 작품을 완성해야 했다.

 



그들은 내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고 내 능력을 100% 끌어낼 수 있도록 여러 가지를 배려했다.
쉐도우 머신에서 주 40시간 풀타임으로 일하고 있던 탓에 디즈니의 작업물에 할당할 수 있는 시간이 제한돼 있었다.
다행히 디즈니 TVA는 주 10시간 이내의 재택근무를 제안했다. 내 작업 환경과 근무와 여가의 균형을 고려해준 조치였다. 다만 가끔 풀타임으로 일하는 데 여유가 생겨 10시간 이상 작업할 수 있을 때는 내 의사에 따라 더 일할 수 있도록 했다.
이미 백그라운드 페인터로 일하던 난 색 조합과 빛을 표현하는 데 소질이 있었다. 그들이 내게 요구한 일도 이와 비슷했다.

전체적인 작품의 콘셉트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중요했다.
작품을 진행할 때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디렉터에게 제시하고 피드백을 받아 수정해나가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그 방식이 매우 직접적이었고 원활해 작업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섬세한 작업보다는 그림에 담아내는 스토리가 더 중요했다. 스토리가 충분히 전달될 정도의 완성도에 이르면 더 이상 작업을 진행하지 않았다.
작은 TV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백그라운드 페인터로 준비된 배경에 색을 입히는 일을 하던 나로선 디즈니와의 협업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이를 통해 느낀 디즈니 철학의 핵심은 애니메이션 제작에서 함께 작품을 만들어나가는 동료로서 아티스트를 대한다는 것이었다. 디즈니는 아티스트를 고용할 때 그의 특별한 능력과 아이디어를 존중한다. 또 유연한 스케줄, 충분한 피드백으로 능력을 마음껏 펼치고 표현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그렇게 나온 아이디어를 작품 콘셉트 설정에 이용하는 방식의 투자가 비록 시간이 오래 걸릴지라도 창의적인 비주얼과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데 탄탄한 기반이 된다는 사실을 디즈니는 잘 알고 있다.
디즈니 TVA와 일하게 되면서 작품에 대한 아티스트의 주관을 이해하고 나아가 아티스트의 스타일과 능력을 폭넓게 활용한다는 점에서 미국의 메이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만드는 작품들이 다채롭고 작품성도 높은 비결을 엿볼 수 있었다.
그들의 이러한 인재 발굴과 활용의 유연성은 세계가 공인할 만큼의 창의성, 대중성과 상업성을 지키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으로 회귀하는 애니메이션 시장
디즈니 TVA와 일하면서 미국의 메이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들이 매년 선보이는 다채롭고 창의적인 작품을 통해 세계 관객들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유연하고도 탄탄한 애니메이션업계 특유의 문화와 그들의 철학을 보고 있으면 약속된 성공만이 남아 있는 긍정적인 미래가 머리에 그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2021년의 블루스카이 스튜디오 폐쇄와 최근 넷플릭스의 잇따른 애니메이션 프로젝트 취소 소식처럼 미국 애니메이션업계의 현재는 마냥 긍정적이라고 평가할 수만은 없다.
코로나19가 세계를 강타했던 2020∼2021년에는 넷플릭스의 성장과 디즈니 플러스를 비롯한 스트리밍 서비스의 성공 가도로 당시 매우 긍정적이었던 미국 애니메이션산업의 전망이 이제 많이 달라졌다.
많은 아티스트가 일자리를 잃었고 나보다 먼저 졸업한 친구들은 올해 들어서야 어렵게 자리를 잡았다. 고용과 동시에 아티스트를 육성하는 넷플릭스의 트레이닝 프로그램(보통 석 달 이하의 기간 동안 일하며 스튜디오에서 여러 수업을 들을 수 있고 멘토를 붙여주기도 한다)에 최종 합격 했던 내 친구도 넷플릭스가 여러 프로젝트를 취소하는 바람에 기회를 잃었다.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애니메이션업계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스트리밍 서비스에 힘입어 성장했다. 돈코 하우스, 쉐도우 머신 같은 인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는 OTT의 투자와 플랫폼에 많이 의지하고 있다.

 

 

그러나 팬데믹이 점차 사라지면서 시청자들이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탈하게 되자 자연스레 제작비가 줄어들고 전시 공간도 축소되면서 인디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관객들은 어떤 애니메이션을 보게 될까.
분명 팬데믹 시기에 볼 수 있었던 애니메이션의 다양성은 줄어들 것이다. 진행이 취소된 프로젝트의 90% 이상은 오리지널 IP를 가진 작품이었다. 플랫폼 사업자들이 코로나19 감염 확산이라는 역설적인 기회를 통해 새롭게 시도한 많은 오리지널 작품의 수익성이 그리 높지 않다는 걸 알게된 것이다.
빅 리스크(Big Risk)가 되어버린 오리지널 작품들이 스트리밍 서비스 플랫폼과 영화관에서 사라지면서 관객들은 앞으로 리메이크, 시퀄과 프리퀄, 마블이나 DC처럼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작품들을 더 많이 보게 될 것으로 보인다.
 

글을 마치며
코로나19 시대가 준 특혜로 여러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고용된 많은 아티스트들이 점점 갈 곳을 잃어가고 있다.
지금 애니메이션업계는 아티스트 포화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세계의 경제 상황과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여파는 애니메이션업계를 위축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미국 애니메이션업계가 쌓아 올린 소통의 철학과 자유의 문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한국도 문화가 발달해 세계 시장에 도전하는 창의적인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

 



아이러브캐릭터 / 김동연 작가 master@ilovecharac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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