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구 기자
master@ilovecharacter.com | 2021-10-08 08:55:19
책을 읽거나 고독을 즐기고 어딘가에 자신이 드러나는 것은 싫어한다. 평소 느긋하고 차분하지만 연기만 하면 내면의 에너지를 폭발시키며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맛본다는 그에게 성우는 자신의 모순적인 성향을 완벽히 만족시키는 축복과 다름없다.
성우라는 직업을 택한 계기가 있나? 어릴 때부터 만화를 좋아했지만 성우란 존재에 대한 인식은 따로 없었다. 평소 “ 목소리 울림이 특이하다 ” , “ 듣기 좋다 ” 란 소리를 가끔 듣곤 했는데 군대에서 어느 날 선임이 내게 “ 목소리가 좋은데 관련 일을 한번 해봐도 좋겠다 ” 며 건넨 말 한 마디를 들은 순간 머리에 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상병 때부터 6개월 넘게 발성 관련 책을 찾아보고 방법도 모른 채 정신없이 뛰어들어 에너지를 쏟았다. 제대 후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와 학원을 다니면서 준비한 결과 1년 반 만에 운 좋게 성우시험에 합격했다. 사실 군대 가기 전까지 학생이었고 아무 생각이 없었다. 제대 후 곧바로 성우가 된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대표작들을 소개해달라 다른 성우들에 비해 애니메이션을 많이 해본 건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대표작을 꼽자면 장금이의 꿈이란 작품이다. 왕의 호위무사이던 민정호란 역을 맡았는데 성우가 되자마자 맡게 된 주연급 캐릭터였다. 당시 마이크 울렁증이 심했는데 갑자기 큰 역할을 맡게 돼 어안이 벙벙했다. 정미숙 , 이선주 등 하늘 같은 선배님들 사이에서 녹음하려니 주눅이 들어 대사를 잘 살리지 못해 벌벌 떨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지나고 보니 왜 그랬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풋내기 시절 나름 잘해보려 연습하던 그때의 추억이 짠하게 남아 있다. 지금도 주위에서 이 작품을 얘기해주시는 분들이 많은데 내 성우 생활의 기반을 닦아준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자신의 목소리가 어떤 캐릭터를 가장 잘 표현한다고 생각하는가? 선하고 차분한 성향의 캐릭터나 조언하는 역할과 잘 어울린다는 얘기를 듣곤 한다. 전속 시절 큰 감정 변화가 없는 조용한 캐릭터를 주로 연기했는데 프리랜서가 되어서도 비슷한 역할이 주어지는 사례가 많았다. 내가 편하게 낼 수 있는 목소리라서 녹음도 부담없이 했는데 자꾸 하다 보니 재미가 없어지더라. 연기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싶어 못된 역할을 하나둘 하다 보니 훨씬 흥미롭고 몰입도 잘돼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요즘은 악역에 재미를 붙였다. 촐랑대거나 촐싹대며 약삭빠른 악역 캐릭터가 잘 맞는다. 대신 덩치가 크고 카리스마가 넘치면서 소리를 잘 지르는 장군이나 보스 같은 느낌의 악역은 힘들다.(웃음)
가장 애착이 가는 캐릭터가 있나? 캐릭터라기보다 장르로 보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건 주로 외화 연기다. 전속성우 시절 외화 더빙만 했고 실존하는 사람에게 목소리를 입히는 작업에 많은 재미를 느껴 외화에 대한 기억이 남다르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Silver Linings Playbook)이란 영화에서 배우 브래들리 쿠퍼가 열연한 팻 솔리타노란 역을 맡은 적이 있다. 외화 더빙을 위한 대본은 보통 녹음 전날 밤 늦게 나오기 마련인데 4차원 성향의 캐릭터를 밤새 연습하는게 무척 재미있었다. 녹음에 들어갔을 땐 그 배역에 확몰입했는데 끝나고 집에 갈 때는 온몸의 기운이 풀려 한없이 나른하고 행복감을 느꼈다. 실제 배우의 표정과 연기를 보면서 목소리를 내다 보니 내 감정을 잘 끌어낼 수 있게 되는 것 같았다.
성우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를 꼽는다면? 나름 중견성우로 활동하고 있으면서도 뭐가 꼭 필요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친화력과 포용력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PD , 팬 , 동료들과 스스럼없이 소통하고 지적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마음가짐이라고 할까. 어디에서나 활발히 일하는 사람은 어느 누구와도 허물없이 잘 지내는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더라. 또 한 가지는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만큼 자기관리와 자기계발을 게을리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원만하고 자신만의 특별한 매력이나 장기를 어필해야 성우로서의 생명력이 오래갈 수 있다.
류승곤에게 성우란? 내게 잘 맞는 옷을 입고 편안하게 쉬고 있다는 느낌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별다른 사회생활 없이 군 제대 후 성우로 살아오면서 감정의 패턴이나 생활습관 , 몸의 리듬이 성우란 직업에 맞춰졌다. 감정을 드러내기 싫지만 적극 표현하고 싶은 나의 모순적인 성향을 만족시키는 완벽한 직업이어서 인생의 축복과 같다.
아이러브캐릭터 / 장진구 기자 master@ilovecharacter.com
[ⓒ 아이러브캐릭터.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