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구 기자
master@ilovecharacter.com | 2023-03-08 08:00:45
회사를 설립한 동기는?
이병준 방송 콘텐츠를 만드는 PD로 일하던 중 당시 로봇 알포란 작품을 만들던 후배의 요청으로 2008년 애니메이션계에 발을 들였다. 뽀로로가 성공하고 방송 콘텐츠와 달리 제작사가 IP 권한을 쥐고 사업을 전개하는 모습에 끌렸다. 그런데 막상 와보니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게 너무 힘들더라. 그러다 후배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면서 회사가 공중분해될 위기에 놓였다. 그래서 이 업계에 머무를지, 방송계로 돌아갈지 고민한 끝에 당시 제작을 총괄하던 이문용 부사장에게 앞날을 같이 해보자고 제안했다. 솔직히 애니메이션을 고집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13년간 다른 장르의 콘텐츠 제작 경험이 있으니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믿고 이 부사장과 합심해 2013년 애니작을 설립했다.
지난 10년간의 소회는 어떤가?
이문용 당시 이 대표의 제안을 받고 많이 망설였다.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과 비즈니스는 다르기에 내가 잘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컸다. 그간의 시간을 돌이켜보면 참 많은 일을 겪었는데 차츰 뭔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더라.
해결하지 못한 숙제는 또 다른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지만 제대로 해결하면 재발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공부로 비유하자면 배우는 방법을 깨우쳤다고나 할까. 피하기보다 부딪치고 집중해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는 뚝심과 배짱이 생긴 듯하다.
이병준 빨리 그만둘걸, 종종 후회하고 있다. 10년 전 내 자신을 원망하기도 한다.(웃음) 버라이어티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알고 시작한 게 아니라 모든 게 처음이었으니 좌충우돌하다가 이제는 투자를 유치할 정도로 성장했다. 모든 작품이 내 자식 같고 고맙다. 좋은 콘텐츠를 만든다는 목표는 변함없지만 사업 쪽으로 잘 풀어내지 못한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좀비덤의 탄생 비화가 궁금하다
이병준 서로 십시일반해 회사를 차렸지만 돈이 부족해 번듯한 사무실 하나 마련하기 어려웠다. 신입 직원을 뽑을 때 커피숍에서 면접을 볼 정도였으니 아무도 오려고 하지 않더라. 주위 도움으로 외주 일감이 하나둘 들어오자 이 부사장에게 “내가 기획을 맡을 테니 딱 1년만 직원들을 먹여 살려달라” 고 요청했다. 그 이후 나온 게 바로 좀비덤이다.
2014년 KBS, 서울산업진흥원, SK브로드밴드가 공동주관한 애니버라이어티 제작지원사업에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좀비덤이 선정되면서부터 비로소 우리만의 일을 시작했다. 뉴미디어 시대에 맞춰 대사 없이 분량이 짧고 템포가 빠른 콘텐츠로 승부를 보기로 하고 앞으로 유행할 아이템을 찾다가 좀비란 소재를 발견했다. 영화에서 사람들과 교감하는 좀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디스토피아적인 분위기가 아니라 코미디, 무언극, 어린이 콘텐츠로 방향을 잡으면 승산이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문용 당시 주위에 좀비란 소재에 대해 얘기했더니 모두 고개를 가로저었다. 문화가 달라 해외로 수출하기 어렵고 종교적 마찰도 우려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캐릭터를 만들어나가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세계관을 만들고 캐릭터도 연구하며 움직임을 개발해 넌버벌 슬랩스틱코미디란 그림을 그려나가니 얘기가 맞아들어갔다. 처음엔 인간의 지성을 유지하고 있는 좀비가 다른 좀비를 때려잡는 좀비특공대를 떠올렸는데 분위기나 이야기가 너무 무거울 것 같았다. 그러던 중 강시, 드라큘라, 몬스터 등으로 구성된 스푸키즈란 작품이 나왔는데 우린 좀비로만 꾸려 차별화하고 포맷과 이야기를 다듬어나갔다.
해외 영상 배급이 활발한데 반응은?
이문용 11분짜리 52편의 시간여행자 루크는 TV, IPTV, OTT 등의 플랫폼에 알맞은 좋은 콘텐츠다. 특히 MG를 받은 이후에도 수익배분이 이뤄지고 있는 효자 상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종영했기 때문에 생명이 다했다고 볼 수 있지만 프랑스 카날플러스(CANAL+)에 진출한 이후 여러 플랫폼에서 꾸준히 팔리고 있다. 아랍어, 일본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히브리어 등 주요 국가별 언어로 더빙한 작품이 대기 중이고 아직 팔리지 않은 나라가 더 많아 기대가 높다. 좀비덤은 세계 230개국에 진출했다. 국내외 유튜브 채널 구독자 100만 명, 영상 누적 조회수 4억 건을 돌파할 정도로 인지도가 높다. 작품마다 생명선이 다른 것 같다. 한 작품이 성공했다고 해서 이를 그대로 따라 하면 잘되지 않더라.
이병준 영상 배급으로 얼마나 벌겠느냐고 생각하는데 시간은 우리 편이다. OTT, 유튜브가 애니메이션 분야에도 많은 기회를 열어줘 해외에 팔 채널이 많아졌다. 이래서 콘텐츠는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격언이 있나 보다.
작품을 관통하는 철학이나 메시지가 있나?
이병준 소통이다. 시간여행자 루크는 과거와 현재, 할아버지와 나, 빌런과의 소통을, 좀비덤은 친구가 되느냐 마느냐를 놓고 벌이는 인간과 좀비의 소통을, 인:앱은 휴대전화 속 대원들과 바깥 이용자의 소통에 관한 이야기를 그렸다.
가슴 벅찼던 순간은 언제였나?
이문용 좀비덤 시즌1이 방영됐을 때 희열이 컸다. 자식 같은 캐릭터들이 화면에 나오거나 놀이공원에 크게 전시돼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무척 기뻤다. 반대로 가장 후회하는 순간을 꼽으라면 작품을 만들고나서다. 매번 스케줄이나 빠듯한 자금 탓으로 돌리며 더 신경쓰지 못했던 게 생각난다. 지나고 나면 만들 때가 좋았다는 후회가 밀려온다.
만들 기회가 있을 때 10년 후 자신을 위해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명확해졌다.
이병준 좀비덤이 애니버라이어티 지원사업에 선정되었을 때 가장 기뻤다. 어려움을 딛고 뭔가 새롭게 시도해보려는 타이밍에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 기회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앞으로의 10년을 준비하는 전략은?
이병준 OTT용 콘텐츠 제작과 자체 IP 개발에 심혈을 기울이겠다. 외주작업과 웹툰사업도 병행하겠다. 애니작이란 이름에는 애니메이션도 있지만 어느, 어떤이란 뜻의 Any란 의미도 담겨 있다. 모든 콘텐츠, IP와 융합해 한곳에서 멀티유즈가 이뤄지는 환경을 만드는 게 꿈이었다. 주위의 많은 도움이 있었고 좋은 일들이 이어졌기에 여기까지 왔다. 이제 겨우 첫 번째 10년이 지났을 뿐이다. 지금까지의 10년은 시작의 끝이라 할 수 있다. 기승전결 중 기가 끝나고 승이 시작하는 셈이다. 그간의 발전 모델을 토대로 다음 10년을 준비하겠다. 우리는 팩토리가 아니라 기획, 창작, R&D를 수행하는 크리에이티브 그룹으로 승부를 걸겠다.
월트 디즈니는 가도 미키마우스는 남아 있지 않나. 누군가 우리의 작품을 보고 재미를 느낀다면 꽤 의미 있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이문용 어설프게 비즈니스맨을 흉내내지 말자는 생각이다.
우린 창작과 기획력이 강하므로 라이선스나 머천다이징 분야 사업보다 작품에 더욱 집중하는 게 맞다고 본다. 그래서 영화, 드라마의 비즈니스 모델을 애니메이션에도 접목해 고용불안, 영세성, 수익모델 부재란 구조적이고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해나가겠다.
아이러브캐릭터 / 장진구 기자 master@ilovecharac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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