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훈 감독의 영화편지] 이 영화를 보았더라면

Review

안재훈 기자

master@ilovecharacter.com | 2025-04-02 15:00:41


“말 걸지 마라”
할머니의 목소리는 단순한 거절이 아니었다. 그 목소리에선 공포로 가득한 고통의 층위를 넘어선, 치유되지 못한 시간이 주는 아픔이 너무도 슬프게 다가왔다.


그 말을 마주한 제작진은 물러날 수 없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이 문제를 만들어낸 이도, 동참한 이도, 고통을 받은 이도, 제대로 들어주지 못한 이도, 제주의 4월 3일을 어렴풋이 들어본 적 있는 젊은 관객도 시작부터 미안함의 눈물로 자세가 바뀌었다.

 

“말 걸지 마라”는 누군가 다가와 주길 바라는 신호가 아님을, 정말로 말을 걸지 말라는 간절한 요청임을 느낄 수 있었다. 도대체 어떤 기억이, 어떤 상처가 할머니를 이토록 떨리게 만드는 것일까.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그 떨림은 점차 나의 것이 되었다. 분노, 미안함, 답답함, 서글픔 등 여러 감정이 흘러갔다.

 


기록은 누구의 것인가
남겨져야 할 기록은 무엇인가. 할머니들의 목소리는 그분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이었다. 교욱 받을 기회가 없었던 여성, 가족 구성원으로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 누구누구의 처로만 불렸던 사망자 명단 장면이 나오는 순간, 극장 안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나의 몸도 떨릴 수밖에 없었다. 하나하나 던져지는 고통이 감독의 연출을 따라가며 외면해야 하는 고통이 아니라 지금 생각해야 하는 의지로 다가왔다.


제주의 푸른 바다와 너울거리는 바람 속에 새겨진, 그러나 점점 보이지 않게 되는 역사의 공포. 온전한 치유는 기록을 통해 가능해진다. 기억되고 제대로 알려진 후에야 비로소 치유가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영화는 아름다운 섬 제주의 풍경을 담고 있으나 그 풍경을 새로이 보게 한다.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지고 굳은살이 박힌 할머니의 손은 마치 제주의 돌담과도 같았다. 영화는 그렇게 은유적으로 말을 건넨다.

 


2011년에 4·3 추모 위령굿을 본 적이 있다. 제삿날이 같다는 사실을 주민들에게 들은 날이었다. 그 사연이 육지의 우리에게까지 전해지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몇 번이고 파도에 부딪히고 바람에 방향이 바뀔 수도 있었다.

 

다큐멘터리 속 목소리들은 영화를 함께 보는 것으로 그들이 겪은 일을 육지 사람들에게, 우리에게 전한다. 판사가 되어 제주의 아픔을 알리고 싶었다던 할머니. 할머니 세대에 판사는 그런 존재였다. 아픈 이들을 대신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자 알아주는 사람. 죄와 벌을 따지기에 앞서 먼저 알아주는 사람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한국적’이라는 것

자주 받는 질문 중 하나가 ‘한국적’이라는 개념에 대한 것이다. 간판에 한글이 적혀 있고 편의과 음식이 등장한다고 해서 한국적인 것일까. 아니면 함께 살아온 이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서 비롯되는 보이지 않는 정서가 한국적인 것일까. 그래서 이 작품 속의 애니메이션이 좋았다. 그것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기억과 감각을 연결하는 매개였다.


우리의 콘텐츠를 사랑해 달라고 말할 때, 그 ‘우리’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더 많이, 더 제대로 알아서 창작자의 재능으로 스며들고 빛나길 바란다.

 

 

목소리들은 극장 배급 방식이 아니라 관객이 직접 상영회를 여는 ‘100개의 극장 프로젝트’로 상영한다. 모든 국민이 4·3 사건의 참상을 기억하도록 전국 각지의 많은 곳에서 영화를 선보이려는 것이다. 관객의 목소리로 극장이 열리는 경험을 해보길 바란다. 나 또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의 극장을 열어 작품을 보려고 한다. 캐릭터를 만들고 소개하며 애써 왔던 애니메이션 관계자들은 이러한 일의 노고를 알고 그 가치를 이해할 거라 믿는다.

 


“처음에는 할머니들의 아픈 과거를 들춰내는 것이 상처를 주는 게 아닐까 조심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촬영에 응해 주신 분들을 만나면서 그분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치유의 한 과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말로 다 하지 못하는 그분들의 고통과 슬픔을 영상으로 표현해내려고 노력했습니다.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을 단지 풍광으로가 아니라 할머니들이 겪어온 그 엄혹한 시간을 반영하는 은유적 이미지로 살리기 위해 같은 장면도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여러 번 찍었습니다. 그것이 저로서는 그분들의 목소리를 최선을 다해 들으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지혜원 감독


“다큐멘터리는 사람들의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날카로운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다큐가 군중을 설득하기보다 옆에 있는 단 한 사람의 구체적인 개인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 영화 역시 많은 정보를 동원해 거시적으로 사건의 전모를 밝히고 설명하는 방식보다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관객이 자신의 이야기처럼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 삶의 갈피갈피가 자신도 모르게 가슴 속에 스며들도록 말이죠. 이 각각의 개별적인 경험과 공감이 모여 결국은 어떤 거대한 역사 인식을 이루어내리라 믿습니다.” 김옥영 프로듀서

 


안재훈 감독
<소중한 날의 꿈>, <아가미>와 한국 단편 문학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메일꽃·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 <소나기>, <무녀도>를 개봉했다. 현재 장편 애니메이션 <영웅본색2>, <시작하는 나의 세계> 연출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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