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훈 칼럼니스트
studiomwp@naver.com | 2026-07-08 08:00:28
사진 찍는 일이 외모가 아니라 기억을 남기는 일임을 알게된 후 나는 찍히는 일이 한결 덜 어색해졌다. 풍경이 아니라 사람을, 그날의 모습이 아니라 그날의 의미를 남기게 되었다. 그렇게 찍은 사진도, 찍힌 사진도 모두 하나의 기록이 되었다.
폴라로이드, 필름 카메라, 일회용 카메라, 디지털카메라. 종류별로 곁에 두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들고 다닌다. 영화의 대사처럼, 셔터 소리가 들리는 순간을 만나기 위해서. ‘여름의 카메라’는 다시 한번 보고 싶어지는 영화다. 우리가 지난 순간을 되돌릴 수는 없어도 그 안에 담긴 설렘은 다시 꺼내어 보고 싶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작품에서 오가는 말처럼 이유가 있어야만 좋아하던 것에서 이유 없이 좋아하게 된 것을 만나는 순간, 그리고 그 자체가 그 이유였음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이 영화는 깊은 성 정체성을 떠난 인간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언어가 아닌 마음의 기록을 보여준다. 편견이 들어서지 않은 마음. 혹은 편견을 넘어 사람 그 자체를 사랑하는 이해를.
영화는 아버지와 카메라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왜 하필 카메라인지. 그 카메라로 맺어진 인연과, 카메라로 알게 되는 비밀과, 카메라로 깨닫게 되는 감정들을 우리는 차례로 만나게 된다.
아버지와 함께 사진 찍기를 좋아했던 소녀 ‘여름’. 하지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가 없는 카메라는 그저 하나의 물건일 뿐이었다.
커다란 가방을 메고 등교하던 여름은 운동장에서 축구부 에이스 ‘연우’를 본 순간 첫눈에 반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꺼내지 않았던 아버지의 필름 카메라를 다시 손에 든다. 어떤 감정이 찾아오는 순간, 우리는 가장 익숙한 것을, 가장 소중한 것을 다시 찾게 되는 법이다. 연우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두 사람은 조금씩 가까워진다.
“이유 없이 좋은 게 좋아.”
“이유가 있는 게 좋아.”
두 사람은 아이답게 솔직한 감정을 말하고 아이답게 투명한 마음을 나눈다.
하지만 여름에게만 다정한 줄 알았던 연우는 사실 모두에게 다정하다. 그리고 그 다정함은 어느 순간부터 여름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사진을 전해주기 위해 필름을 현상한 여름은 그 속에서 우연히 아버지의 고등학교 시절 사진을 발견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감춰져 있던 비밀의 흔적과 마주하게 된다. 그러면서 연우와의 관계는 점점 어른을 닮아가고, 어른의 언어를 닮아간다.
첫사랑의 설렘과 함께 아버지가 남긴 기억을 따라가던 여름은 사진 속에 감춰진 진실과 자신의 마음을 마주하기 시작한다.
“짐이 별로 없네”라는 엄마의 말에 “조금 가벼워졌어”라고 답하는 여름. 그 한마디는 그동안 등 뒤에 짊어지고 다니던 커다란 가방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졌음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낯설고 버거웠던 배낭이 서서히 익숙해지며 끝내 이런 답안지를 건넨 것이다. 그렇게 어깨 위에 놓인 짐의 크기가 줄어든 날 여름은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우리가 짊어지고 다니는 여러 결핍과 고난의 무게를, 영화는 어머니의 말로 가만히 위로한다.
영화 속 어머니와 단짝 친구는 사실 대부분의 해답을 쥐고 있다. 다만 그것이 너무 익숙하고 뻔한 이야기 같아 무심히 넘겨버리기 쉬운, 그래서 미처 눈치채지 못하는 다정함이 그 안에 담겨 있었을 뿐이다.
하늘 역을 연기한 김시아 배우의 발음이 좋았다. 애니메이션이 업이다 보니 나는 늘 목소리에 마음이 간다. 어떤 호흡으로 어떤 발성으로 감정을 실어 보내는지. 김시아 배우의 단정한 연기는 그 자체로 한 번의 셔터 소리 같았다.
곽민규 배우가 만들어내는 캐릭터 해석은 놀라웠다. “너, 처음 봤을 때보다 빛난다”라는 대사의 앞뒤 연기에서 오므린 주먹과 자세, 들뜬 목소리의 톤까지 좋았다.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그리면서 ‘저기까지는 그려낼 수 없겠는데’라고 여겼던 지점이라, 그 발견이 더욱 기뻤다.
단발머리 연우를 연기한 유가은 배우는 앞으로 어떤 배우가 될지, 또 어떤 감독을 어떻게 만나게 될지 기대하게 만드는 빛을 지녔다.
영화 속에서 여름의 아빠는 “여름이란 성장이 눈부시게 이루어지는 계절”이라고 말한다. 여름은 가지를 드러내지 않은 채 무성히 어우러진다. 그 그늘 안에서 가지들이 마음껏 자라날 수 있도록. 영화도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닐까.
극장에 앉은 그 순간이 우리를 조금 더 자라게 하는 하나의 여름이 되도록.
때로는 사랑하는 당사자가 아니라, 이유 없이 곁에 얽힌 누군가에게서 위안과 위로를 받는다. 사랑에는 생각보다 더 섬세한 마음이 필요할 때가 있다.
아빠가 말하던 중앙선. 아빠의 죽음이 놓인 중앙선. 그리고 카메라를 들고 서 있는 나의 모습.
그렇게 성장이 눈부시게 이루어지는 계절에서 그 여름을 꼭 만나보셨으면 한다. 마음에 셔터 소리가 들리는 찬란한 순간을. 사랑에서, 삶에서, 그리고 나 자신에게서 그 순간을 만나보시길 바란다.
안재훈 감독
<소중한 날의 꿈>, <아가미>와 한국 단편 문학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메일꽃·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 <소나기>, <무녀도>를 개봉했다. 현재 장편 애니메이션 <영웅본색2>, <시작하는 나의 세계> 연출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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